Page 299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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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학생들의 생사조차 모르던 상황 속에 학교 책임자인 교장도 복교를 단념하던 때, 선생
혼자서 복교의 날을 만들어낸 것은 학교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설립인가도 나지 않았
는데 오산중학교라는 간판을 내어 걸었던 것이다. 이러한 만용에 가까운 선생의 행동은 오직 학
생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일념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마음이 통했는지 며칠이 지나자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선생이 보고자 한 성호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은 별로 없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몰
려온 것이다. 그러고는 묻는 말이 “여기서 수업을 받으면 증명서를 해 줄 수 있으며 그 증명서를
자기네 본교에 가지고 가면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에 선생은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선생의 복교는 성호고등공민학교 학생을 소집해서 수업을 해보려는 것이었
는데, 타교 학생까지 모아 수업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해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상
황을 선생은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란 생각에 망설였으나, 지금은 전시이고, 부산이나
대구에는 전시 연합학교가 있어서 모든 학교의 모든 학생이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듣고 있으므로 선생은 용기를 내어 “소원대로 해 주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등록이나 하
라.”고 장담을 하였다. 이 일은 훗날 선생의 바람대로 이루어져 이 학교를 거쳐간 학생들이 많
았고 모두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오산중학교의 소문은 급속도로 전파되어 찾아오는 학생들은 날로 늘어났다. 큰소리쳤
던 이기춘 선생은 속으로는 은근히 겁이 났다 한다. 교사들이 조속히 복교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하게 될 텐데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 좁은 마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진지하고도 초롱초롱한 눈들을 바라볼 때 마음이 아팠고 책임감을 느꼈다
한다.
그러던 차에 장세복 선생이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선생은 부탁하여 장세복 선생
도 1951년 4월 25일 사무실에 나오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힘으로는 아직도 어려운 상태여서,
할 수 없이 서상길 이사장도 학생들 지도에 임하게 되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자 세 사람은 의논
끝에 폐허이기는 하지만, 사택 건물이 남아 있으니 학교 간판을 사택으로 옮기고, 사택 건물 기
둥에 烏山中學敎의 간판을 옮겨 걸었다. 그런데 학생의 수효가 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층이 다
양해서 즉 중학생도 있고 고등학생도 있어 훌륭하신 선생님을 찾던 중에 가까운 정남면에 이병
렬(李秉烈)선생을 찾게 되어 오산지역의 교육 발전을 위해 도와달라고 간청을 하였는바 쾌히 승
낙을 얻어 6월 16일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
오산학원 탐구 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