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5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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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발령되었다. 고등공민학교의 편제는 일반 중학교와 동일하였으나, 다른 점은 문교부의 시설
기준의 엄격한 제한을 받지 않았으며 남녀공학이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에 있어서의 남녀공학
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당시 오산에는 중학교가 없었을 뿐 아니라 수원이 시로 승격되면서 신설된 화성군 전체에서
도 중학교가 하나도 없는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포착하여 고등공민학교 오산 유치
의 선봉에 선 사람이 서상길(徐上吉)이었다. 이분은 과거에 강습소(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간이
초등교육기관)를 경영하고, 그 교사를 역임한 경험을 가진 분으로서 고등공민학교의 설립 인가
를 받고 설립자가 되었으며, 학교 이름을 성호고등공민학교(城湖高等公民學敎)라 하였다. 이때
가 1948년 11월 20일이었다. 그리고 즉시 신입생을 모집하여 11월 30일에 58명의 남녀 합격자
를 발표하였으며, 12월 6일 드디어 입학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처 교실까지는 마련하
지 못했던 관계로 성호국민학교의 교실을 빌려서 수업하기로 하였다. 또 성호고등공민학교 교
사로서는 이기춘뿐이었고, 임시 조치로서 성호국민학교의 교사가 출강하게 되었다. 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서영석(徐英錫) 당시 성호국민학교 교감, 한창석(韓昌錫), 장세윤(張世潤), 그리고
여학생 지도를 위해 이병숙(李秉淑)이 출강했다.
중등교육기관이 없었던 오산 사회에서는 비록 정식 중학교는 아니지만, 고등공민학교 설치에
깊은 호응을 하며 즉시 성호고등공민학교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회장에 이철배(李哲培), 부회장
에 서상길, 임종식(林宗植)이 선출되었다. 개교한 지 한 달 후인 12월 6일에는 교사 김규철(金圭
哲)이 부임하여 전임교사가 두 사람이 되었다.
1949년 1월 4일에는 김성옥교장이 사임하고 교육위원회에서 파견한 최상권(崔尙權)교장이 취
임하였으며, 이어 양형승(梁炯承) 강사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3개월도 안되어 최교장이 사임하
였으므로, 다시 김성옥 교장이 겸임하게 되었고 이봉상(李鳳商) 강사도 취임하였다. 이분은 당
시 서울 경동고등학교 교사로서 국내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서양화가였다. 신병이 있어 요양차
오산에 내려와 있었던 때라 모셔온 것이다. 1949년 7월 8일에는 김성옥 교장이 전근됨에 따라
후임으로 유시형(柳時蘅) 교장이 고등공민학교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3. 재단법인 오산학원 설립 인가
이후 오산사회에서는 성호고등공민학교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내친김에 오산중학교를 설립
하자는 여론이 높아져서 1949년 7월 31일에는 드디어 오산중학교 설립추진을 위한 이사회를 결
성하였다. 8월 10일에는 신입생 40명을 모집하였고, 강사 서부갑(徐富甲), 최찬균(崔燦均)이 취
오산학원 탐구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