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4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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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학교가 폐쇄되자 이를 인수하여 1913년 4월 1일 오산공립보통학교가 「조선교육령」에 의
해 개교하였다. 오산공립보통학교의 초대교장 무나카다 겐주로가 부임하였는데, 무나카다는 일
제 식민지교육에 박차를 가하여 일본화 교육에 힘쓰며 한국인의 민족성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5)
이후 오산공립보통학교는 1938년 성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성호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학교뿐만 아니라 사설강습회까지 통제하였으며, 이들을 일본
의 도구로써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뜻있는 오산의 유지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애국운동의 일
환으로 사설학교 혹은 학원을 설립하였다. 1923년 금곡리의 유지였던 오산청년동맹위원장인
공석정이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오산리로 이전). 대성학원은 민족혼을 가진 청년으로 기를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고자 했다. 대성학원은 일제의 감시하에 위축되던 중 방화로 문을 닫았다.
또 현재 삼미초등학교의 전신인 삼미의숙이 1923년 4월 4일에 지역유지였던 윤학영에 의해 설
립되었다. 초대 김시환 교장이 취임하였으며,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1948년 9월
24일 국가에 헌납되어 삼미국민학교로 개교하였다. 1925년 4월 28일엔 세교리의 홍종각에 의
해 설립된 사립학원인 광성학원이 있었다. 개교 당시 학원장은 문병상이었다. 일제의 많은 탄압
을 이겨내고,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광복 이후 1949년에 광성국민학교가 되었다. 6)
2. 오산중학교(烏山中學敎) 전신 성호고등공민학교(城湖高等公民學敎)
1945년 8·15광복 직후의 우리나라 문맹률은 78%나 되었다고 한다. 미군이 이 땅에 진주하
여 군정을 펼치면서 민주주의 의식 고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맹 퇴치가 가장 시급한 사안
이란 판단하에 군정 당국에서는 1946년에 공민학교(公民學敎)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은 당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단기간(1~3년)에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하
게 한다는 취지에서 시행한 것이다. 그러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일관된 교육
정책에 의해 이번에는 중학교 과정을 이수토록 하는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敎)설치령을 공포
하였다. 이 고등공민학교는 공립학교였기 때문에 교장은 교육청(교육위원회)에서 임명하고 그
밖의 모든 운영은 설립자를 선정하여 그로하여금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설립 당초에
는 그 지방 초등학교교장으로 하여금 겸임토록 하여 초대 교장은 당시 성호초등학교 교장이 겸
5) 위의 책, 258쪽
6) 위의 책, 260쪽.
292 정진흥·남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