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7 - 오산문화총서 8집
P. 297
4. 6·25전쟁과 오산학원의 오산중학교 설립 의지
이러한 희망을 무참히 짓밟은 것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이다. 오산에 침투한 인민군들
을 소탕하기 위해 이들을 향해 투하한 포탄으로 말미암아 어렵사리 마련한 임시교사는 모두 파
괴되어 주춧돌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다만 교장 사택 하나만 달랑 남았음은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하는 수 없이 1950년 6월 29일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남침한 북한 인민
군이 오산지역을 점령한 날은 1950년 7월 5일이다. 오산사회는 곧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고 유
엔군의 폭격은 연일 계속되었으므로 학생들을 모아 수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
한 환경 속에서 서영석 교장과 이기춘 선생, 김규철 선생은 재단법인 오산학원 인가 서류와 학
교의 중요한 서류를 보따리에 싸가지고 폭격을 피하고, 인민군을 피해서 이곳저곳을 숨어다니
느라 진땀을 뺏다 한다. 어느 때는 기총소사에 의해 목숨을 잃을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날을 보내는 가운데도 전황은 호전되어 1950년 9월 27일 연합군이 오
산을 탈환하게 되었고, 곧이어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었다(9·28수복).
5. 9·28수복 후 1952년 10월 20일 오산중학교 설립 인가
당시 오산사회는 중학교 설립에 대한 갈망이 워낙 컸다. 이러한 전쟁 혼란 속에서도 설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또, 오산학원 설립인가 서류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
도 했다. 서울이 수복되자 서영석 교장과 이기춘, 김규철 선생은 즉시 직원회를 소집하여 10월
11일 임시휴교를 해제하고 개교하게 되었다. 이때는 피난 갔던 교사들도 모두 다시 만나게 되었
고, 제법 수업 분위기는 조성되어 가고 있었는데 전쟁의 양상이 갑자기 뒤바뀌게 된다. 중공군
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유엔군이 밀리며 후퇴하게 되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에 소개령이 내려
져 정부는 대전을 거쳐 대구로 남하하게 되었다(1·4후퇴).
이렇게 되자 할 수 없이 12월 12일 재차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51년 1월 6일에는 경
기도에 소개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교사, 학생 모두는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서영석 교장은 재
단법인 오산학원의 인가 서류를 짐 속에 꼭꼭 챙겨서 가족들과 함께 대구로 남하하였다. 이기춘
교사도 1월 8일 륙색에 약간의 식량을 담아 짊어지고 가족과 헤어져 대구까지 걸어서 남하하게
되었으며, 대구에 가서는 서영석 교장과 김규철 교사도 만났다.
오산학원 탐구 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