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2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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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에 힘든 줄도 모르고 땀을 흘렸다. 선생과 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어 모교의 터를 닦는데, 온 힘
을 쏟아부었으며 힘들다고 불평하는 학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간혹 수업이 길어지는
날이면 “오늘은 작업 안해요?”하고 자진해서 작업장으로 나서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선생
님들을 줄이어 모셔왔다. 5월 10일에는 안재숙(安在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땀 흘린 끝에 5월 25일 신축교사 상량식을 거행하였고, 이기춘 선생은 자신이 직접 상량문을
썼을 때의 흥분과 기쁨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공사하는 중에도 학생들의 작업은 계속되었
다. 올라오는 길을 닦아야 했고 벌채한 나무들을 정리하느라 쉴 새가 없었다.
고진감래라 했든가. 1952년 7월 19일 드디어 전교생이 신축교사로 이사를 하고 목재 향기 가
득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을 때, 모두 환희에 찬 얼굴들이었다.
이러한 환호와 기대 속에 1952년 10월 20일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오산중학교 설립인가
가 떨어졌다. 이때 학급 수는 6학급이었다. 11월 1일에 이원섭(李元燮) 선생이 취임하였고, 11월
16일에는 신축교사 낙성식을 겸하여 오산중학교 설립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모두들 소리
높여 오산중학교 만세를 외쳤다 한다.
이렇게 마음은 기뻤으나 새롭게 손봐야될 일이 많았다고 한다. 교실은 생겼지만, 언덕 위에
허름한 집 한 채를 세워놓고 보니 그 둘레에 토목적으로 손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것이
다. 정신없이 나날을 보내고 해가 바뀌어, 드디어 1953년 2월 25일 중학교 제1회 졸업식이 거행
되었다.
참으로 감격적인 졸업식이었다. 손때 묻은 삽자루를 내려놓고 졸업장을 손에 든 졸업생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7. 오산중학교 비약
오산중학교 탄생의 기반이 되었던 성호고등공민학교는 이제 그 사명을 다하였으므로 1953년
7월 10일을 기해 폐교조치 되었다. 이 해에는 또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건
축용 자재를 다량으로 얻은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 그 주변의 기관
이나 원주민들을 원조해 주는 부서가 있어 공적인 목적일 때, 누구나 교섭해서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서영석교장의 조카되는 이태우(李台雨)가 오랫동안 미군부대에서 통역관을 해왔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에 밝아서 서교장에게 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서영석교장의 부탁을 받
고 오산에 내려와 오산비행장의 미군부대를 찾아 교섭을 벌인 결과 상당량의 건축용 목재를 원
조받게 된다.
300 정진흥·남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