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4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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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다. 그랬어도 제복을 입지 않은 학생은 없었다.
셋째, 학생들의 성적 평가에 있어서는 추호도 사사로운 정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졸
업반 학생 중에서도 유급생이 생겼다. 입학시험 성적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칼날같이 잘랐다. 매
사가 이렇다 보니 오산 사회가 시끄러워졌다. 아주 우습게 보았던 조그마한 중학교가 건방지다
고 본 것이다. 유지들의 청탁이 들어오고 재단 임원이라는 분의 압력이 들어오고 했어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폭풍을 앞장서서 막아낸 분이 유경로 선생과 이병렬 선생이었다. 이병렬
교장은 온건하고 인자하기만 해서 무사주의를 좋아하는 분이셨으나, 그러나 이분들이 불의와
싸우는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믿음으로 일을 맡겼다. 이러한 강력한 힘은 모든 선생님들
의 교육 정신이 정의를 추구하고 성적 평가에 있어서도 공정무사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발
휘된 것이다.
이 압력과 비난과 모함이 사라진 것은 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난 다음부터이다.
졸업식이 있었어도 이 지방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고 더군다나 대학 진학에 대해서 전혀 기
대를 하지 않았었다. 어디 삼류대학에라도 가게 된다면 다행이거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서울에만 갔다 오면 합격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서울대 문리대,
서울대 사범대, 서울대 치대, 서울대 농대, 서울대 공과대, 고려대, 서울시립대 등등 제2회 졸업
생, 제3회 졸업생으로 이 경사는 이어졌다. 오산사람들의 놀라움은 컸고 오산중학교, 오산고등
학교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제서야 오산중학교의 참모습과 선생님의 진정한 교육정신
을 알아차렸다. 미움은 존경으로 바뀌었다. 학부모들은 모든 일에 대해 학교를 신뢰하고 자녀들
을 학교에 보냈다. 선생님들은 교직 생활의 보람을 느꼈고, 박봉이었지만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선생님은 없었으며, 모두가 교장이요, 교감이 된 심정으로 학교 일을 걱정하고 학생지도에 심혈
을 기울였다. 이 폐허 속의 주춧돌 위에서 내리쪼이는 태양볕에 땀 흘리고, 그리고 시정 사람들
에게 마치 정신병자로 비쳐졌던 처참했던 바닥에서 어떻게 이러한 학교가 생겨날 수 있었는지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도 집에 갈 줄도 모르고 둘러앉아 학교
일을 걱정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선생님들, 등교할 때 한쪽 어깨에는 책가방, 또 한쪽 어깨엔
삽자루를 메고 나와 반나절은 공부, 반나절은 작업하면서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던 학생들에
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302 정진흥·남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