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0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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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편 오산면 서리 에 피난해 와 머물고 있던 유경로(兪景老) 선생을 이기춘 선생 부친이 찾아
               가 우리 자식을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여 6월 20일에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
                이 두 분은 이 학교의 처지로서는 너무나 과분한 분들로서 당시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이 학교에서 근무할 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 분은 교육이란 어느 곳에서 해도 경중이 없

               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분들로서 직장의 고하나 대소를 전혀 가리지 않는다는 교육주의자로
               서의 신조에 철저한 분들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주춧돌만 앙상한 학교요, 보수도 없는 직장에 봉

               사활동을 한다는 정신으로 취임을 승낙한 것이다. 그리고 훗날 이분들에 의해 오산중학교, 오산
               고등학교의 기초가 굳건하게 다져지게 된 것이다. 특히 유경로 선생은 연세도 높았지만, 사회생
               활이나 교육경력도 풍부한 분으로서 오산중학교의 은인이라 불러도 과한 것이 아니었다.



               6.  교육을 신념으로 승화한 선생님들, 오산사회의 감동과 유지들의 협조를 통
                 한 오산중학교 탄생



                두 분 선생이 오면서 본격적으로 주춧돌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주춧돌 위에 앉아 수업
               을 받는 것이다. 통나무를 얼기설기 걸발을 만들고 그 위에 먹을 갈아 까맣게 칠한 조그만 흑판

               을 그 위에 얹어 마당 한가운데 뻗쳐 놓고 뙤약볕에 땀을 흘리며 수업하는 모습은 아마도 대한
               민국에서 여기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묵을 구하기 어려워서 수원에 가서 사오고 지우개가 없어

               수건을 말아서 대용으로 썼다. 학교부지가 대로변이었기 때문에 많은 오가는 사람들이 이 모습
               을 바라보았다. 당시 호기심보다는 멸시의 눈으로 쳐다보기도 하였고 미친놈으로 비치기도 하
               였지만,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기춘 선생은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학생

               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이 주춧돌은 마침내 오산 사회를 감동시켰다.
               처음에 아주 냉대하던 오산 사회에서 점차 유지들이 나서서 오산중학교를 살려 보자고 서두르

               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오산 사회의 관심은 이사회를 소집하고 논의한 끝에 화성군수의 도움을 청해 보기로
               하였다. 마침 이기춘 선생의 선친과 김용석(金容錫) 화성군수와 친분이 있었으므로 선친을 앞세

               워 군수를 찾아가 화성군 내에 아직 중학교가 하나도 없으니 군수 재직 중에 하나의 업적으로서
               중학교를 하나 설치해 달라고 건의하였다. 재단법인 오산학원의 설치인가를 이미 받은 터이니
               추진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설명에 군수는 쾌히 승낙하였으므로, 즉시 이사회를 개편




               7) 현 오산시 서동



               298  정진흥·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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