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8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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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춘 선생의 기록을 통해 개인 체험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한다.



                뜻밖의 실향민이 된 선생의 생활은 비참하고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유난히도 추웠던 대구의
               몇 달 동안의 쓰라린 나날들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 당시는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는데도 그러

               했는데, 어린 것들을 거느린 가족들의 고통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갑자기 떠나게 된
               피난으로 노자도 마련하지 못한 채 내려온 나날 몇 달이 지나자 식생활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고 한다. 그래서 차라리 자원입대하여 전쟁터라도 나갈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산 수
               복령이 내려졌으며 귀향하고 싶은 사람은 막지 않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다. 귀가 번쩍트인
               이기춘 선생은 즉시 서영석 교장을 찾아가 귀향하겠다고 하니, 이선생은 가족들이 오산에 있으

               니 올라가 보라고 하며 나는 올라가봐야 학교는 다 불타버렸다 하고…. 오산중학교가 언제 설립
               될지 막연한 일이라고 하며 차라리 이곳에서 직업을 찾아보겠다고 하며 귀향의 뜻이 없었다. 하
               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하고 1951년 2월 26일 이기춘 선생은 대구를 출발하여 길도 없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3월 20일 집에 도착한다. 도중에 여러 곳에서 검문을 당했지만, 성호고등공민
               학교 교사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어려움을 모면하고 귀향할 수가 있었다.
                집에 당도하니 이기춘 선생의 할아버지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계셨다. 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한다. 이 울음은 아무리 피난을 가시자 해도 막무가내 듣지 않고 집을 지
               킨 할아버지의 모습에 저 살겠다고 도망친 불효자의 감정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분노와 서러움

               이 함께 겹쳐 울음이 터졌던 것이었다.
                집을 떠난 지 71일 만에 집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고, 다음 날 즉시 다 부서져 터만 남
               은 학교에 나갔다. 이렇게 한 것은 현재 공터로 있으니 어떤 엉뚱한 사람이 침범하여 무허가 시

               설물이라도 설치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겠고, 또 장차 오산중학교가 설립되면 그 자리에다 교사
               를 신축해야 할 것이므로 그 터를 잘 보존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렇게 시찰을 마친 다음 날 서상길 이사장이 댁에 돌아와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기춘 선생
               은 곧장 학교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서 이사장을 찾아가 수업을 시작해 보겠다고 건의했
               다. 서상길 이사장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건의에 찬성하고 “우리

               집 바깥마루를 내어 주겠으니 우선 그곳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라.”고 했다 한다. 이기춘 선생
               은 용기를 내어 여기저기 판자 쪽을 주어다가 대충 대패질을 하여 조그마한 흑판을 만들었고 좀
               길쭉한 판자를 밀어 <烏山中學敎> 라고 써서 마루 기둥에 내 걸었다.

                모두가 열정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던 당시의 교사들의 열정은 지금의 오산학원의 주춧돌이었
               던 것이다. 모든 주민들이 전쟁 속 난리를 피해 달아나고 숨고 할 때였다. 학교는 폐허가 되었고




               296  정진흥·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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