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3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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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를 싣고 온 미군 트럭이 왔으나, 청학리의 동네길이 좁아 학교까지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마을 입구에 부려 놓고 가버렸다. 이러한 상태인지라 학생들의 운반작업이 시작되었다.
발안 다리에서부터 목재를 어깨에 메고 학교로 들어오는 학생들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학
교에서는 이 목재를 활용하여 강당을 신축하였고 그 낙성식을 기념하여 학생들의 연극제가 벌
어졌다. 오산사회에서는 처음 보는 신기한 일이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박수갈채를 쳤
다. 6학급밖에 안 되는 조그만 중학교에서 강당 건물을 따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으며, 파격에 가까운 일이다.
1954년 3월 2일에는 중학교 제2회 졸업식이 거행되었고, 1954년 3월 17일에는 대망의 오산
고등학교 설립이 인가되었다. 이어서 6월 11일에는 고등학교 교사(당시 동관이라 하였다)의 신
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중학교 교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1955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감을 따로따로 두어야 한다는 문교부 방침에 의해 4월 1일
자로 이기춘 선생이 고등학교 교감, 4월 26일에는 유경로 선생이 사직함에 따라 김승록 선생이
중학교 교감을 이어받아 이로써 고등학교와 중학교의 교무행정이 완전 분리 운영 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학생 수는 날로 늘어 6학급이던 것이 9학급, 12학급 이렇게 급속도로 증설 인가
를 받게 되었으며 많은 선생들이 학교에 부임해 오게 되었다. 1953년에서 1955년까지 불과 2년
여 동안에 20명이나 오시게 되어 학교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창립 당시부터 1957년 3월 피치못할 사정에 의해 이기춘 선생도 정든 학교를 떠나게 된다. 창
립 때부터 10년에 가까운 기간 몸담았던 이기춘 선생이 피력하는 오산중학교에 대한 소회이다.
첫째, 오산중학교는 계급의식을 초월한 인격적으로 완전 평등한 학교였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어느 기관이나 직무상 계급적인 호칭이 있게 마련인데, 오산중학교에서도 그러한 교감이나
교무주임이 있었으나 서로 직위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위계질서가 흐트러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계급과 위계질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유경로
교감은 인품이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강직함과 10원이 남은 출장비를 학교에 반납하는 청렴함
과 학문적인 자신감과 교육에 대한 신념이 남이 범접할 수 없는 인품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둘째, 오산중학교의 교육 방향은 자율과 자유였다. 도서관 운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도서관에서는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완전 개방식 운영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선생님 중에도 반
대하는 분이 계셨지만 실시하고 그해가 다 가도 책 한 권 도난 당하는 일이 없었다. 당시 우리
나라의 모든 중학교에서는 학생들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녔었다. 명찰을 달지 않으면 학생들의
품행이 나빠지고 불량 학생이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는 선생님도 계셨으나 불량 학생이 늘었
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또 제복과 제모는 만들어 입도록 정했지만, 그러나 착용은 강요하
오산학원 탐구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