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7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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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린 등이 돌아와서 백성들이 아뢴 말을 아뢰자, 내가 본부(本府)의 부사(府使)는 백성들
                   을 거느리고 먼저 물러나서 다시 남은 뜻을 거듭 선포하라고 명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수원
                   의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푸는 윤음을 환궁한 뒤에 써서 내릴 것이니, 감영(監營)과 고을이 상
                   의하여 행궁에 게판(揭板)하고 이어 방곡(坊曲)에 선포하여 각각 잘 알게하라.” 하였다. 이어
                   속미음(粟米飮) 1첩(貼)을 달여들이라고 명하였다. 속미음을 먹고 하교하기를, “수원의 주정
                   참(晝停站)에서 과천의 숙소참(宿所站)에 이를 때까지는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마병(馬兵)과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선상(先廂)이 되며, 금군별장(禁軍別將)이 선대금군(先隊禁軍)과 후대
                   금군(後隊禁軍)을 모두 영솔하여 후상(後廂)이 되고,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두 영(營)의 보군
                   (步軍)을 거느리고 후상의 미국(尾局)에서 약간 사이를 두고 대오(隊伍)를 짓되 사이가 끊어

                   지는 것에 구애받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천천히 행군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수원 관사와 과천 관사의 숙소(宿所)를 앞으로 동가할 때에는 품처(稟處)하
                   지 말고 그대로 사용하라고 기영(畿營)에 분부하라.” 하였다. 승지 홍인호(洪仁浩)가 아뢰기
                   를, “초취(初吹)가 울리기도 전에 시위(侍衛)가 지레 앞서 자리를 떠났으니, 해당 병조의 당
                   상을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교를 타고 재실을 나와 교
                   에 말을 매고, 공조판서 이문원(李文源)을 소견하였다. 일용면(日用面)을 거쳐 사천점(沙川
                   店)에 이르러 광주(廣州)의 창사(倉舍)로 들어가 교에서 내려 조금 머물렀다. 교를 타고 창사

                   를 나와 은행정(銀杏亭)을 거쳐 과천의 현문(縣門)을 들어가 교에서 말을 풀고 행궁으로 들어
                   갔다. 하교하기를, “내국(內局)의 도제조(都提調)는 병이 있다고 하니 그의 뜻에 따라 체차해
                   주고, 먼저 즉시 집으로 돌아가 안심하고 조리하라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게 하
                   라.” 하였다. 경기감사 서유방(徐有防)과 과천현감(果川縣監) 윤행임(尹行任)은 백성을 거느
                   리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조금 전에 수원의 백성들에게 선유(宣諭)한 하교
                   를 가지고 기백(畿伯)과 본읍(本邑)의 수령이 일일이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서유방 등이
                   명을 받들어 선포한 뒤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정조 13년 10월 8일>





                 ② 1793년부터 1794년까지
                 1791년 화성행궁 건립으로 1792년(정조16)까지 능행차의 경로에서 수원행궁이 화성행궁으로
                변경되었으며, 동일한 경로로 총 2차례 진행되었었다. 이전 기록에서 보였던 백성들의 고민 및

                과거 응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내용이 확인된다. 그 내용은 아래의 표6와 같다.







                                                         오산의 문화재와 정조대왕 능행차에 대한 검토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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