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2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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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降觀于桑卜云其吉)’라는 뜻을 취한 것이고, 평(坪)을 ‘대유(大有)’라 하고 도랑을 ‘만석(萬石)’
                 이라 한 것은 모두 풍년이 들기를 빈 것이다.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돌을 채취해 다듬어서
                 그 이름들을 기록하게 하고, 곧 말을 타고 출발하여 장안문(長安門)을 거쳐 행궁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려 봉수당(奉壽堂)에 나아가 어좌에 오르니, 화성유수 이하 장관(將官)과 수가한 장
                 관 이하가 규례대로 참현례(參現禮)를 행하였다.
                 <정조 19년 윤2월 11일>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으로 살펴보았을 때,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무예연습을 한 기록과 수원화성 주변으로 관개시설로 경제적인 이점이 구체적으로 보고되어있
               으며, 이러한 내용이 향후 관개시설을 축조하는 것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⑤ 1797년

                1797년에는 2차례 능행차를 실시하였으며, 1월에 진행한 행렬과는 다르게 8월에는 장릉을 들
               렸다가 현륭원으로 이동하였다. 그 경로는 아래의 표14와 같다.


                                            표 14. 1797년 정조 능행차 현황
                  연 도          기  간                    경   로                      비  고

                  1797          5일        창덕궁 → 배다리 → 노량진 → 양천행궁 → 장릉
                                                                             장릉 경유 현륭원 행차
                 (정조21)     (08.15.~08.19.)  → 부평행궁 → 안산행궁 → 현륭원 → 화성행궁



                                         표 15. 1797년(정조21) 08.15.~08.19. 기록
                  『정조실록』 47권, 정조 21년


                 · 김포군수(金浦郡守) 홍대협과 과천현감(果川縣監) 김이유를 불러보고 고을의 폐단과 백성
                 의 고통을 물어보았다. 홍대협이 아뢰기를, “본군의 민호(民戶)는 1천여 호에 지나지 않는데
                 군액(軍額)은 1천 7백여 명이니, 속히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도신(道臣)과 상
                 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김이유가 아뢰기를, “개울이 되어버린 옛날 재결(災結)
                 13결(結)이 영재(永災)에 들어가지 않아서 해마다 생판으로 징수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화성(華城)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김포 행궁에서 출발하였다. …
                 (중략)…

                 <정조 21년 8월 16일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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