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1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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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2. 1796년(정조20) 01.20.~01.24. 기록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 장차 현륭원(顯隆園)에 배알하려고 어가가 화성(華城) 교귀정(交龜亭)에 이르러 우의정 윤
시동에게 이르기를, “관개(灌漑)하는 이익이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 못을 파면서부터 1년
이 지나지 않아 앞 들판에서 수확한 것이 이미 1천곡(斛)이 되었다.” 하고는, 인하여 정자(亭)
를 ‘영화(迎華)’로, 야(野)를 ‘관길(觀吉)’로, 평(坪)을 ‘대유(大有)’로, 도랑(渠)을 ‘만석(萬石)’으
로 각각 명명하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행궁(行宮)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정조 20년 1월 20일 1번째 기사>
· 상이 행궁에 있었다. 동장대(東將臺)에 나아가 무예를 시험하고 군사를 사열하고 매화포
(埋火砲)를 구경하였다. 상이 군용(軍容)이 엄히 정돈된 것을 가상히 여겨 유수 조심태에게
구마(廏馬)를 하사하고, 장용사(壯勇使) 김지묵이 73세 나이로 과녁을 명중했다하여 호피(虎
皮)를 내렸다.
<정조 20년 1월 22일 1번째 기사>
표 13. 1796년(정조20) 01.20. 기록
『일성록』, 정조 20년 1월20일
· 어가가 화성(華城) 행궁에 머물렀다.
…(중략)… 잠시 후에 내가 말을 타고 출발하여 진목정(眞木亭)에 이르니, 좌의정 채제공(蔡
濟恭)이 길가에 마중 나와 배알(拜謁)하기에 내가 승지에게 명하여 그를 위로하게 하였다. 교
귀정(交龜亭)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정자 위에 올라갔다. 정자는 기둥이 대략 10여 개이
고 사면이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바로 작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으로 큰 못을 굽
어보는데, 못에는 채방(彩舫)이 떠있었다. 평야는 드넓고 논밭은 두둑을 따라 착착 정비되어
있었다. 몇 해 전 전교에서 북성(北城) 밖의 척박한 땅을 그 깊이를 살펴 1장(丈) 혹은 반 장을
파서 씨앗 100곡(斛)쯤 뿌릴 수 있는 경계(經界)를 헤아려 정하고 둔전을 설치하라고 한 것이
바로 여기를 가리킨 것이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을 소견하고 내가 윤시동에게 이르기를,
“관개(灌漑)의 이로움이 대단히 크지 않은가. 이 못을 파고 나서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앞 평야에서 수확하는 것이 이미 1000여 포(包)라고 한다.” 하고, 이어 정자 이름을 ‘영화(迎
華)’라고 지어 주었는데 매년 화성사람들이 여기에서 취화(翠華)를 맞이한다는 뜻이고, 들을
‘관길(觀吉)’이라 한 것은 ‘내려와 뽕나무가 적당한가를 관찰하니 점괘에 길하다 하더라.
오산의 문화재와 정조대왕 능행차에 대한 검토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