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4 - 오산문화총서 8집
P. 244
표 17. 1798년(정조22) 02.01.~02.05. 기록
『정조실록』 48권, 정조 22년
· 유사(有司) 제신(諸臣)을 행궁에서 소견하였다. …(중략)… 성지(城地)가 아무리 튼튼할지
라도 결국 민심이 절로 성(城)을 이루는 것만은 못한 것이니, 민심이 튼튼해진 다음에야 공호
(珙護)를 오로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주(楊州)·고양(高陽) 등 능침 모신 곳들에 대하여 열
성조에서 전세(田稅) 감면의 혜택을 내려주신 것이 또한 오늘날에 내가 우러러 계승해야 할
한 가지 일이다. …(중략)… 화성 한 부(府)로 하여금 영원토록 모곡의 명색이 없도록 한다면
화성의 백성들에게 막대한 혜택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제신 중에 혹자는 ‘모곡 전체를 감
해야 한다.’고 말하고, 혹자는 ‘지출을 계속 대기가 어려우니 의당 모곡의 절반만 감해야 한
다.’고 말하여,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정조 22년 2월 2일 2번째 기사>
· 경기관찰사 이재학이 아뢰기를, “현륭원 행행시에, 광주에 향곡을 첨가한 것이 열읍의 민
폐가 되었다하여 특별히 바로잡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중략)…
<정조 22년 2월 3일 8번째 기사>
표 18. 1799년(정조23) 08.19.~08.21. 기록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 헌릉(獻陵)에 행차하였다. 관왕묘(關王廟)를 둘러본 뒤에 주교(舟橋)에 이르러 칠언근체시
(七言近體詩) 두 수를 지었다. 영묘(英廟) 무자년 상이 동궁에 있을 때 어가를 모시고 헌릉을
참배하러 갔는데 용주(龍舟)로 광나루를 건너면서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이때에 와서 옛일
을 회상하여 그 당시의 운자로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과천(果
川) 행궁에 당도하니 날이 아직 새지 않아 군병들에게 조금 휴식을 취하라고 명하였다. 아침
해가 돋을 때 헌릉에 나아가 직접 제사를 지내고 재실로 들어가 또 칠언율시 한편을 지었는
데, 역시 무자년 당시의 운자였다. 신하들이 또 다시 화답하여 올린 뒤에 과천 행궁으로 돌아
와 머물렀다.
<정조 22년 2월 3일 8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으로 살펴보았을 때, 행차를 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고통이 되는 부
분들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나타나는 것이 확인된다.
242 신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