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9 - 오산문화총서 8집
P. 249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이장한 후에 인근에 존재하는 독산
성에 대해서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요청하지만, 병기를 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정조와 신하의 대화이다. 독산성은 삼국시대에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백제·신라·고구
6)
려의 각축전이 지속되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독산성의 방어적인 기능적 가치를 중요하게 판단하여 존치하는 것으로 판
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정조가 추후에 독산성의 수축을 진행한 것도 독산성
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체계를 구축하려고 한 것으로 판단된다.
② 1790년 기록
표 21. 1790년(정조14) 기록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 어가(御駕)가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나아가 장대(將臺)에 올라갔다. 운주당(運籌堂)에 이
르러 산성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기를, “그대들 중에는 나이 많은 노인이 많으니 경진
년에 어가가 머물렀을 때 구경한 사람이 있겠구나.”하니, 부로들이 아뢰기를, “경진년에 온천
에 행차할 때 어가가 운주당에 머물러 숙소(宿所)로 삼았는데, 신들은 거의 다 의장(儀仗)들
을 반갑게 쳐다보았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일을 너희들은 기억하고 있는가?”하니, 부로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어가가 머무른 날에 친히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보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려주었으며, 진
남루(鎭南樓)에 올라 과녁을 쏘아 연거푸 4발을 맞추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내가 31년 만에 이 산성에 올라 이 집에 앉아서 백성들을 불러 예전 일
을 묻노라니, 슬픈 감회를 누를 수 없다. 뜰 안에 들어온 부로(父老) 가운데 온천 행차 때 은
전(恩典)을 입은 사람은, 승려이건 속인(俗人)이건 간에 나이를 따지지 말고 특별히 한 자급
(資級)씩 올려주고, 성 안의 민간에는 매 호(戶)마다 쌀 한 섬씩을 주어, 이날의 감회가 깃든
뜻을 표시하라.”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득중정(得中亭)에 들러 각신(閣臣)·장신(將臣)들과 더불어 과녁을 쏘았다. 상
이 다섯 발을 쏘아 네 발을 맞히고는,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활을 쏜 것이 마
침 경진년의 옛 일과 똑같으니, 마땅히 뜻을 보이는 일이 있어야 하겠다.”하고,
6) 1592년(선조25) 12월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독산성에 주둔하며 왜군 수만 명을 무찌르고 경기지역으로 북상할 수 있도록 하
면서 전략적 중요성을 입증하였다. 이후 남한산성, 용인 석성산성과 함께 도성 방어를 위한 중요 거점성으로 인식되었다.
오산의 문화재와 정조대왕 능행차에 대한 검토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