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3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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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792년 기록
표 24. 1792년(정조16) 기록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
· 전교하였다. “공씨(孔氏)가 우리 나라에 건너와 맨 먼저 수원(水原)에 정착한 사실이 읍지
에 실려 있는데 일전에 도신으로 하여금 그곳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여 그 그림
에서 찾아보니 궐리사(闕里祠)란 사우(祠宇)도 있고 은행나무도 심어져 있으며 대대로 눌러
사는 후손들도 있었다. 또 궐리(闕里)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지은 영당(影堂)이 있
다고 하였다. 문헌공(文獻公)의 시호를 내린 뒤로도 조정이 공씨 집안을 우대하는 일에 있어
보통 예와는 달리해야 할 것이니 도백으로 하여금 궐리 옛터에다가 집 한 채를 세워 내각에
있는 성상(聖像)을 모시게 하고 영당에 모셨던 진영(眞影)도 모셔다가 함께 봉안하고서 이름
을 궐리사라 하라. 사우의 편액은 써서 내리겠다. 봄·가을로 지방 수령에게 향(香)과 축(祝)
을 내려 제사를 모시게 하고 제사에 쓰이는 제수들은 대략 이성(尼城) 궐리사(闕里祠)의 예대
로 시행하되 한사코 정갈하고 간략하게 하라. 그렇게 하고 나면 이른바 새로 세웠다는 영당
은 고을 유생들이 사사로이 세운 것에 불과하고 또 간직했던 영정마저도 함께 봉안하였으니
재목이며 돌들도 당연히 이곳에다가 옮겨 세워야 할 것이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제향을 드
릴 일이겠는가. 서원 지키는 재생(齋生)에 있어서도 그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공씨를 시키도
록 하고 다른 유생은 감히 섞이지 못하게 하여 시비 거리가 없도록 하라. 이 전교를 써서 강
당에다 게시하라.”
<정조 16년 10월 3일 2번째 기사>
② 1795년 기록
표 25. 1795년(정조19) 기록
『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 용양(龍驤) 봉저정(鳳翥亭)에서 잠시 머물러 점심 수라를 들고, 시흥(始興)의 행궁(行宮)
에서 유숙하였다. 예조판서를 보내어 공자(孔子)의 영전(影殿)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게
하였다.
<정조 19년 윤2월 9일 2번째 기사>
오산의 문화재와 정조대왕 능행차에 대한 검토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