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0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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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 조심태에게 금갑(金甲) 한 벌을 내려주었다.
<정조 14년 2월 10일 1번째 기사>
· 수원부(水原府)의 부로(父老)들에게 유시(諭示)하였다. “현륭원에 참배하고 돌아온 뒤에도
그 생각이 잊혀지지 않고 또렷하다. …(중략)… 애초에 급복해주라는 명령은, 바로 토지에 대
한 고정적인 조세를 면제한다는 뜻이었다. …(중략)… 지방관으로 하여금 이 열 줄의 윤움(綸
音)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거듭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조치가 선대 무덤을 위하고 나아
가 백성들에게까지 미쳐 나가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하라.”
<정조 14년 2월 15일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1760년(영조36)에 온양온천 행차 후 환궁하던 사도세자가 장마로 황
구지천이 범람하여 세람교를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 안 남쪽에 있는 운주당(運籌堂)에서 하
루 유숙하게 된다. 이후 1790년(정조14) 능행차 당시에 독산성을 방문하여 1760년에 방문했던
사도세자에 대해서 효심이 들어나는 대목이다. 사도세자 방문시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배푼 것
처럼 정조도 독산성에서 동일하게 행한 것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
다. 이러한 효심을 바탕으로 정조는 재위기간동안 총 13차례 매년 1차례 이상의 능행차를 실시
하였다.
③ 1792년 기록
표 22. 1792년(정조16) 기록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
· 독성산성(禿城山城)을 수축하였다. [성의 주위는 1천 4보(步)로 전체 성 중 신축 부분이 7
백 32보, 수축한 부분이 2백 72보이다. 수문(水門)은 세 곳을 개축하였고, 성가퀴도 3백 9보
를 신축하였으며, 남장대(南將臺)는 옛터에서 3척(尺)을 옮겨 다시 세웠다.] 전교하기를, “산
성은 중요한 요해지이고 원침(園寢)에서 가깝다. 또 경진년에 머물러 숙박하였던 곳이며 장
대(將臺)는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곳이다. 지금 수리를 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려야겠다. 원임 각신(閣臣)들 중에서 적임자를 좌상(左相)이 써서 올리도록 하
라.” 하였다.
<정조 16년 10월 3일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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