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1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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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1792년 기록
표 23. 1793년(정조17) 기록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
· 명하여 경기 좌방영(京畿左防營)을 남양(南陽)의 독성(禿城)으로 옮겨 설치하고, 중군이
겸하던 토포사(討捕使)도 새로 설치한 곳의 방어사가 예겸하도록 하였다. 수원을 승격시켜
유수부로 삼은 뒤에 상이 방어사와 토포사를 어느 고을로 옮겨야겠는가를 묘당에 물은 결과
묘당이 남양에 옮겨 설치하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정조 17년 1월 16일 2번째 기사>
· 장용영이 내영과 외영의 새로 정한 절목을 올렸다. [내영의 절목은 …(중략)… 1. 독성산성
(禿城山城)은 이미 요새로서의 중요한 지역이자 또 군량을 쌓아둔 곳이니, 방어하는 도리를
소홀하게 할 수 없다. 전에 총융청의 소관이었던 장초(壯抄) 2초, 아병 1초, 둔장초(屯壯抄)
68명, 군수보(軍需保) 1백 25명을, 본성의 소관 아래 모집해 들인 군관 30인, 수첩군관 1백
30인, 아병 2초, 봉족군(奉足軍) 4백명, 별무사 1천 5백 23명과 함해서 성을 수비한다는 명목
으로 본성에 전속시키고, 그 중 장초 2초, 아병 1초, 둔장초 68명, 군수보 1백 25명은 본래 쌀
을 납부하는 군인들이었으니, 그 납부 한 쌀은 외영에서 받아 유치한다.“]
<정조 17년 1월 25일 3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정조는 독산성의 방어적인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하였
다. 그에 따라서 독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장용외영의 설치 및 수원을 승격하여 독산성에
방어사를 배치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경기남부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앞서 사료들을 살펴보았을 때,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정조에게 있어서 아버지(사도세자)
를 추억할 수 있는 효심의 장소였으며, 한양으로의 진출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수
원 화성을 방어하는 방어체계의 역할을 담당하는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다. 정조의 능행차와 독
산성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능행차 기간 중에 독산성을 방문하여 아버지(사도세자)의
30년전 모습과 그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1790년 능행차의 한 축을 담당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또한, 현륭원 이장·수원 화성 축조·만년제 축조·궐리사 축조 등 수원부를 중심으로 행한
일련의 모습들을 보았을 때, 수원화성으로의 천도를 염두해두고 그 주변에 기반시설을 마련하
기 위해서 노력한 정조의 모습이 보여진다. 그 과정에서 수원화성의 방어체계 역할을 독산성이
담당하였으며, 그러한 모습이 독산성의 대대적인 개축과 장용외영 설치 등으로 표현된 것으로
오산의 문화재와 정조대왕 능행차에 대한 검토 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