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6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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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8. 1789년(정조13) 기록
                 『홍재전서』, 정조 13년 10월6일


                 · …(중략)…이날 신시(申時)가 될 무렵에 대여가 과천현(果川縣)에 이르러 찬궁(欑宮)에 안
                 치하였다. 압구정(狎鷗亭), 사평(沙坪), 반초동(盤草洞), 도리정(闍梨井), 태봉(胎峯), 화락동

                 (和樂洞)에서 여섯 번 교대하여 운구(運柩)하였다.
                 6일(무오)에 닭이 울자 대여(大轝)가 과천을 출발하여 진시(辰時)에 사천(沙川)에 이르렀다.
                 대여를 멘 사람들을 먹이고 오시에 수원의 신읍(新邑)에 도착하였다. - 일용리(一用里)와 용
                 연(龍淵)에서 두 번 교대하여 운구하였다. - 신시에 신원(新園)에 도착하여 - 상류천(上柳
                 川), 하류천(下柳川), 독봉(禿峯), 학현(鶴峴), 세람교(細藍橋)에서 다섯 번 교대하여 운구하였
                 다. - 재궁(梓宮)은 정자각에 안치하고 찬궁에는 영좌를 뫼셔 지방을 안치하고 찬을 놓는 탁
                 자를 설치하였다. 명정, 소선(素扇), 소개(素蓋), 증옥함(贈玉函), 증백함(贈帛函)은 좌우로 나
                 누어 열을 짓고 길복의 흰 의장은 물려서 머물게 하였으며, 유문(帷門) 안에 빈소를 만들고
                 묶은 끈을 풀고 네 번째로 옻칠을 하였다.

                 <정조 13년 10월 6일>





















               사진 6. 세람교지 부재 및 봉학교비 사진


                『일성록』과 『홍재전서』의 사료로 보았을 때, 정조의 초창기 능행차 경로에 세람교가 포함된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수원행궁에서 현륭원으로 이동할 때, 상류천→하류천→독봉→학현→세람교
               를 통해서 재실로 들어갔으며, 세람교가 1789년까지는 기록에서처럼 삼남길과 능행차의 주요

               경로인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독산성의 방어적이 성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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