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4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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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永樂五年世在乙未王以碑麗不歸屬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用馬兼
8 羊不可稱數
영락 5년 세재 을미, 왕은 비려가 고구려의 속인으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친히 군사를 인솔하
여 가서 討하였다. 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세 부락 6,7백 영을 깨뜨리고 기마용 말
과 양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노획하였다.
09 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軍至窠
10 南攻取壹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
6년 병신년 왕이 수군을 궁솔하여 이잔(利殘)을 討하였다. 국군(國軍)이 과남(窠南,남쪽의 오
목한 곳)에 이르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등을 공취하였다.
다음은 광개토왕비문 제1면 8~9행과 제2면 6~7행에 쓰인 破다. 攻破가 아니라 破 한 글자로
표기하였다.
8 百殘新羅舊是屬民
9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써 서로 조공하여왔다. 그런데 왜를
신묘년에 불러들였으므로 바다를 건너가 백잔을 깨뜨리고(破)…
6 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
신라견사 백왕은 왜인이 가득차서 국경의 토성과 저수지를 파괴하고(破)…
20) 討利殘國軍至窠南
필자는 討와 破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쓴 광개토왕비문에 의거하여 제1면 9행의 기록을 ‘討利
殘’으로 석문한다. 이어 討利殘 이후의 글자를 國軍至窠南(국군지과남)으로 석문한다. 이 부분
을 ‘討伐殘國’으로 석문한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한다. 討伐이라는 두 음절의 쓰임은 《삼국
사기》에도 그 전례가 없다. 殘國이라는 낱말 또한 어떤 국어대사전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殘
國이란 단어는 하나의 단어로 성립될 수 없는 낱말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討利殘/國軍至窠
152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