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6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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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神天皇, 八年 春三月,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及峴南,

                 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先王之好也
                 응신천황, 8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왜)
                 에 무례하였다. 그래서 나(我)의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백제 아화왕은 왕자 직지(전지)를 천조(왜)에 보내어 선왕의 자상함을 다시 찾았다.



                倭 응신천황은 백제 아화왕이 무례하여 나(我)의 침미다례(강화도?), 현남(충북?), 지침(충남
               서부?), 곡나(황해도?), 동한(강원도?)의 땅을 빼앗겼다고 기술한다. 독자들은 ‘나(我,응신천황)

               의 땅’이라고 기록한 이 부분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倭 응신천황 예전(譽田)이 백제 침류왕 ‘餘
               ’이 아니고는 언급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백제 침류왕 ‘餘’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6개월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제 제15대 왕이면
               서도 외자 이름 한 자 남기지 않고 사서에서 사라진 의문의 인물이다.
                《삼국사기》는 침류왕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왕의 어머니는 아이부인(阿尔夫人)이다’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그의 이름을 가렸다. 그런데 침류왕의 이름 ‘餘’는 그의 시호 枕流와 倭 응신
               천황의 이름 예전(譽田)에 그 단서가 주어진다. 침류왕의 이름은 ‘餘田’이었으며 침류왕 여전은
               열도로 흘러가서(枕流) 응신천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기실 침류왕을 낳은 아이부인은 신공황후 기장벌희(氣長足姬)였다. 그녀는 부산시 기장구 기
               장벌 출신의 가야한국의 왕녀였다. 16세에 倭 제14대 중애천황(仲哀天皇) 중언에게 시집간 한반
               도 부산시 기장구의 여걸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기록 氣長足姬는 機張伐姬로 읽힌다. 그

               녀의 이름에 그녀의 고향 지금의 부산시 기장군(機張郡) 기장벌(機張伐)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
               이다.

                倭 중언천황에게 시집간 기장벌희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천황 중언의 나이가 이미 50세의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열도로 시집온 지 7년 후, 황후 기장벌희는 중언천황을 설득하였다. 바
               다 건너 황금의 나라 신라를 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신라에게 빼앗긴 그녀의 나라 가야한

               국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다.
                천황과 황후는 열도의 각지에서 군사와 돛배를 모아 축자(築紫,구주)에 이르렀다. 그때 중언

               천황이 축자의 행궁에서 갑자기 죽었다. 저녁밥을 먹고 황후의 무릎에 누워 황후가 뜯는 거문고
               연주를 듣다가 숨을 거두었다. 황후 기장벌희가 늙은 천황을 독살하였다는 소문만 무성하였다.
               그러나 천황의 죽음은 황후 기장벌희의 엄명으로 철저히 비밀에 가렸다.




               154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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