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8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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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군이다. 무려 53개의 돈대와 진지가 강화군에 구축되었다.

                강화군은 백제 한성의 관문이자 고려 개성의 관문이고 조선 한양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는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였던 삼별초의 근거지, 조선시대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대피지,
               구한말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4) 선위관미성(先圍關彌城)



                393년 8월, 백제 아신왕(아화왕)이 장군 武에게 군사 1만을 주었다. 제장 武는 고구려에게 빼
               앗긴 한수 이북의 석현성 등 5개 城을 회복하고자 먼저 關彌城을 포위하였다. 관미성(강화군?)
                                         8)
               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관산반도 에 위치한 석현성 등 5개 성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병사가 관미성을 굳게 지키므로 탈환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강화군은 한반도 최고 최대의 빗장이다. 강화군는 백제의 수도 한성의 빗장이

               고, 고려의 수도 개성의 빗장이고, 조선의 수도 한양의 빗장이었다. 백제가 동서남북 사면에 초
               병을 배치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히 저지하던 관미성이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피하던 강화군, 조선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침략에 대피하던

               강화군, 구한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강화군은 한반도 최고의 요새다.



               5) 관미성은 강화군이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백제의 관미성을 교동도로 보았다. 사면초절하고 해수환요하다는《삼국사

               기》의 기록에 부합한다. 그러나 강화군 교동도는 그 규모가 작은 섬이다. 용능병한 광개토왕이
               군사를 7分하여 7道로 20일간 공격할 대상이 못 된다. 그렇다면 백제 관미성의 정체는 더 큰 읍

               성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의 강화군 교동도, 석모도, 강화도로 보아야 한다.
                관미성이 강화군이었다는 근거는 또 있다. 강화도에 남아있는 행정지명 양도면과 화도면과
               서도면의 道다. 양도(良道), 화도(華道), 서도(西道) 등의 지명이다. 양도와 화도와 서도는 고구
                                                               9)
               려군이 진격한 分軍七道의 道에 연결된다. 강화군 양도면  홈페이지는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8) 관산반도, 황해북도 개풍군.
               9) 양도면, 연혁 및 유래, 강화군 양도면 홈페이지, 2022.



               136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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