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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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조사된 석성이 교동도 북쪽에 존재한다. 행정지명 또한

               고구리와 고구저수지가 아직도 그대로 전한다. 고려 때에 세운 교동읍성의 성문이 아직 생생하
               게 남았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는 고려시대 북송의 사절단이 머무르던 읍성이기도 하였
               다. 필자는 백제 관미성을 강화군 교동읍성으로 이해한 이병도의 주장에 일부분 동의한다.



               2. 관미성은 강화군 교동도일까



               1) 漢水北諸部落多沒焉



                391년 7월, 백제는 漢水 북쪽의 석현성 등 10城을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빼앗겼다. 동년 10월
               에는 해수환요하고 사면초절한 관미성마저 빼앗겼다. 이에 백제 진사왕은 석현성 등 10城과 관
               미성을 되찾고자 구원행궁(狗原行宮,용인구성)에서 사냥을 하며 倭의 원군을 기다렸다.

                                            5)
                그해 11월, 倭 응신천황(應神天皇) 이 원군을 보내왔다. 왜왕 응신은 장군 기각숙니(紀角宿禰),
               우전시대숙니(羽田矢代宿禰), 석천숙니(石川宿禰), 목도숙니(木菟宿禰) 등을 보내 백제 진사왕의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에 백제의 국인들이 고구려에 영토를 빼앗긴 진사왕을 시해하여 사죄하였

               다. 왜장 기각숙니 등은 침류왕의 태자였던 아화(阿花: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위에서 백제 진사왕이 구원(狗原)에서 사냥하였다는 것은 군사훈련을 의미한다. 여기서 구원

               (狗原)은 현재의 수원과 용인을 가리키고, 구원행궁은 용인시 기흥구 구성로 구성초등학교 인근
               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용인 구성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왕자, 왕모 소서노
                                                           6)
               가 도읍을 세울 땅을 찾아 올랐던 한산 부아악(負兒岳) 의 아랫마을이다.


               2) 分軍七道의 의미


                391년 10월, 고구려 광개토왕은 군사를 7分하여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였다. 한반도의 음력
               10월은 북서계절풍이 부는 겨울이다. 광개토왕이 이때를 선택하여 관미성을 공격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전략으로 보인다. 하나는 북서계절풍에 돛을 단 군선을 띄우기 쉽다. 그 둘은 밭농사,
               벼농사의 가을걷이를 모두 마친 때로 식량을 확보하기 좋은 때다.





               5) 응신천황,《완역 일본서기》,전용신譯,1993,일지사,172쪽.
               6) 부아악(負兒岳),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삼동.



               134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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