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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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를 7分하여 7道로 나누어 진격시켰다는 것은 공격목표가 7개였으리
라는 가정이다. 과연 分軍7道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찾아보자.
11세기, 강화군은 7개로 이루어진 섬산이었다. 위로부터 교동도의 화개산, 석모도의 해명산·
상주산, 강화도의 별립산·고려산·진강산·마니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강화군은 교동도, 석
모도, 강화도의 3개의 섬산으로 이루어졌다.
강화군이 7개의 섬산에서 3개의 섬산으로 통합된 것은 몽골군의 침입 이후의 일이다. 고려 정
부가 수도 개성을 떠나 강도(江都)로 이주한 이후 강화군의 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개경의 10만
백성이 한꺼번에 강화군으로 이주하자 먹고 살 식량이 크게 부족하였다.
이에 강도의 고려 정부는 강화군의 드넓은 갯벌을 논밭으로 바꾸는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
였다. 섬과 섬을 잇는 갯벌을 막아 농토로 만들었다. 30여 년간의 간척사업으로 본래 7개의 섬
산이었던 강화군은 3개의 섬산으로 합쳐졌다.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로 통합되었다. 한반도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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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간척사업이었다. 그 근거는 강화군 화도면 의 유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옛날에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이었으며, 강화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하도
면(下道面)이라고 칭하다가 1937년 하도공립보통학교장으로 부임하여 왔던 일본인 산원(山元)
의 제청으로 하도(下道)라는 명칭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화도(華道)로 개칭하였다.」
이후 강화군은 우리나라 간척사업의 모델이 되었다. 시화 방조제, 서산만 간척사업, 새만금
방조제로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므로 관미성의 정체를 다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
3) 20일간의 관미성 전투
고구려 광개토왕이 관미성을 점령하는 데는 20일이 소요되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漢城을 공략하는데 걸린 7日 7夜보다 무려 3배가 넘는 시일이 걸렸다. 관미성을 빼앗는 것
이 백제의 도성 한성을 빼앗는 것보다 3배나 힘들었던 전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미성은
교동도, 미라고성, 오두산성처럼 작은 목표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큰 읍성이었다는 의
미로 확대된다.
모름지기 한반도 최고 최대의 빗장은 단연 강화군이다. 교동도, 석모도, 강화도를 포함한 강
7) 화도면, 연혁 및 유래, 강화군 화도면 홈페이지, 2022.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모수성은 독산성일까?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