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4 - 오산문화총서 8집
P. 124

Ⅶ. 훈련대장 이완과 수원부사 유혁연





                효종은 재위 10년이 되던 해에 우암 송시열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토로하였다.



                “내가 일찍이 나와 이 일(북벌)을 함께 추진할 자는 오랑캐에게 죽은 집안의 자제이지 그 나머

               지는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무릇 신하들은 자신의 부귀만을 도모하고 이런 일을 진행하다가 나
               라가 망하고 집안이 엎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말이 이 일에 미치면 마음을 떨지 않은 이가
               없다. 나 혼자 개탄할 뿐이다. 저네들은 자손이나 위할 뿐이지 즐겨 나를 돕지 아니한다.”                       5)

                효종은 말만 앞세우는 송시열 같은 문인들을 믿지 않았다. 이들이 외면하거나 반대하지 못하
               도록 높은 벼슬로 다독이고 대의명분으로 압박했던 것이다. 효종은 문인들 대신 충직하고 유능
               한 무인을 발굴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군부를 개혁하고 군영을 강화하기 위해 적임자를 찾아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가 급선무였던 것이다. 효종은 1653년에 훈련대장 구인후의 후임으로
               영의정 정태화가 추천한 무인 이완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반정공신이며 문
               인이 독점하던 훈련대장에 순수한 무인을 임명한 것은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

               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훈련도감 군졸들 다수가 대장 이완을 원망하고 비방하는 여론이 일어났
               다. 효종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며 까닭을 묻자 정태화는 이렇게 변호한다. “구

               인후는 나이가 많은 데다 성질이 유순하여 병졸들이 대장을 무서워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
               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완이 들어와 기율이 엄중하고 분명하니까 모두 지레 겁을 먹고 그러는
               것입니다. 앞으로 5~6개월만 지나가면 틀림없이 그가 늦게 온 것을 한할 것입니다.” 정태화의

               말처럼 정말 몇 개월 뒤에 훈련도감의 기율이 잡히면서 대장 이완의 능력이 입증되었다. 효종의
               인사는 성공적이었다. 정승으로 발탁했던 김육, 이경석, 정태화 같은 뛰어난 경세가들이 정책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효종에게 비밀리에 추진하던 북벌정책을 공론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654년
               에 청나라가 러시아 정벌을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조정은 북우후 변급을 영장으로

               러시아에 포수로 편성된 군대를 파병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의 간섭과 감시 때문에 조정에서



               5)  효종의 이 발언은 송시열의 시문집 <송서습유>의 <악대설화>에 나온다. 악대설화는 임금과 마주 앉아 나눈 대화라는 뜻으로
                효종10년 3월 11일에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고 나눈 대화기록이다. <송서습유>는 정조가 간행한 <송자대전>에 빠진 시문을 모
                아 고종 때 펴낸 책이다. 송시열의 기억에 의존해 지은 것이므로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이 많을 것으로 보지만 상당 부분은 당
                시의 사실을 전달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122  김영호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128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