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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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수원부사와 김자점의 옥
1623년 이귀·김류와 함께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자점은 인조가
즉위하자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집권 공서파의 영수가 된 김자점은 김상헌 등 유림을 배
경으로 한 청서파를 탄압하였다. 1645년, 청나라에서 오랫동안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돌아온 소
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인조가 세자빈 강씨에게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
어씌우자 김자점은 앞장서서 그녀의 사사를 주장했다. 이처럼 김자점은 늘 인조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김자점은 손자 김세룡을 인조의 서녀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외척
이 된 뒤,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김자점의 독주는 제동이 걸리게 된다. 평소 김자점의 전횡
을 비판하던 대사간 김여경과 집의 송준길 등의 탄핵을 받고 김자점은 파직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몰래 청나라에 보내 조선이 장차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이며, 김상
헌과 김집이 청나라를 배척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인조의 묘지문을 증거물로 청나라에 보내 양국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나라는 곧장 군사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사자를 보내 진위여부를 가리려 하였다.
효종과 정승 이경석의 재빠른 수습으로 위기를 모면한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일으킨 김자점을
엄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심문을 통해 죄상이 속속 드러나자 김자점을 광양으로 유배 보
냈다. 궁지에 빠진 김자점은 효종에게 앙심을 품고 역관 이형장을 통해 조선 조정의 북벌정책을
청나라에 몰래 보고한다.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송시열의 ‘장릉지
문(長陵誌文)’을 증거물로 보냈다. 이에 분개한 청나라가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고 사신을 조선
에 보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이때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가 사신을 설득했다. “김자점은 내
의원 도제조로서 선왕께서 위독하던 때 시약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본직을 파하였다.”
청나라의 추궁은 사은사로 갔던 조선 측 사신을 황제의 명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구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더 이상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영의정 이경석과 예조판서 조경이
자진해서 의주의 백마성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산당세력들을 끌어들여 친청파를 제거
한 후 북벌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수원부가 다시 논란의 중심이 된다. 반정공신이자 친청파로 인조 말에 권
력을 장악한 영의정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과 수원 부사 변사기가 반역을 도모한 정황이 밝혀
진 것이다. 수원부사 변사기가 휘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김자점과 대립하던 척화파의 영수 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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