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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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봉림대군은 지휘관의 오만과 무능으로 성이 함락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의 분열된 내부 사정을 잘 파악했던 것처럼 효종 역시 청 내부의 취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
                었던 것이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죽은 이듬해인 1644년 중원에 들어온 이후 청은 만주 시절의 상무정신을

                서서히 잃고 문약화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1649년 5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제17대 임금으로 즉위한 31세의 젊은 왕 효종은 신하들에게

                북벌대의를 천명하고 은밀하게 북벌정책을 추진하였다. 북벌의 실현을 위해 효종은 위험한 모
                험도 감행하였다. 인조 말부터 조정을 장악한 친청파 영의정 김자점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고,
                김상헌과 송시열 등 척화파를 등용하여 조정의 분위기를 변모시켰다. 효종은 양반사대부들의

                주류인 송시열 등의 산림 세력을 설득하지 않고는 북벌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효종이 가장 주력한 것은 군사조직의 효율적인 개편과 정예 군대의 양성이었다. 이를 위해 호

                포법, 노비양처종모법, 서얼허통, 대동법 같은 개혁 정책을 시행하였다.
                 효종은 즉위 초에 도승지와 공조판서를 지낸 박서(朴遾, 1602~1653)를 병조판서에 임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겼다. 박서는 효종의 북벌정책에 뜻을 같이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

                았다. 효종 2년(1650) 조선에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다이곤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정책도 크게 달라진다.

                 효종은 일찍부터 수원의 군대를 주목하였다. 1650년에 효종은 병조를 통해 특별한 하교를 내
                린다. 능소에 참배하던 날, 수원부사 윤창구가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어가를 호위하였는데,
                군사들의 소매 폭이 모두 넓을 것을 효종이 목격한 것이다. 효종은 수원부사 윤창구를 불러 이

                렇게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한가로운 자나 입는 옷이다. 어찌 창을 베개 삼아 계엄하는 정신
                이겠는가.”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국왕에게 몸을 굽혀 절하며 예를 표현하는 잘못도 지적하며

                즉시 고칠 것을 명한다. “임금의 수레가 지날 때 두 손을 마주 잡고 몸을 편 채 꿇어앉아서 단지
                경건하게 대기하는 예만을 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능소에 나갈 때는 이에 의해 거행하
                라.” 2)

                 효종은 능행에 동원한 수원부의 군대를 통해 무사들의 상무의식을 진작시키고 군대의 기율을
                잡아나갔다.






                2)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 8월 27일 임신 16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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