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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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鄭太和, 1602~1673) 같은 명재상이 효종을 보좌하고 있었다. 효종의 탁월한 인사정책

                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효종은 훈련대장 이완과 어영대장 유혁연을 통해 공신들의 사병으
                로 전락한 군대를 개혁하여 정예의 군대로 육성하였다. 군부의 안정은 안팎의 어려움 속에서도
                북벌정책을 중단 없이 추진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효종의 뒤를 이은 제18대 임금 현

                종의 군사정책도 새롭게 살펴보았다.
                 학계는 현종이 재위했던 시절을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정책이 폐기되면서 군사력 또한 크게

                약화된 시대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현종 시대가 효종 시대보다 군사력이 더욱 강화되었던 사
                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종은 무인 최윤덕을 정승으로 삼은 세종 이후 200여 년 만에 무인 이
                완을 정승에 임명하여 상무 분위기를 조성한 국왕이다. 본국검을 비롯한 창검 무예를 개발하고

                널리 보급한 공로도 빠트릴 수 없다. 또한, 훈련대장에게 공조판서를 겸임하도록 하여 금광을
                개발하고, 군영에서 무기를 원활하게 제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예송논쟁에 가려졌지만,
                현종은 말년에 왕권을 위협하는 서인을 내치고 남인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환국정치를 실

                행한 최초의 임금이기도 하다.
                 이완(李浣, 1602~1674)과 유혁연(柳赫然, 1616~1680)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실천한 주역이다.
                 북벌정책의 진실에 다가서려면 두 장수의 생애를 살펴야 한다.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에 임명되어 군영의 개혁과 북벌정책에 앞장섰던 정익공 이완, 수원 부
                사로 재직하며 병사들의 훈련과 병기를 잘 수리한 공로로 승지에 발탁되었다가 북벌의 선봉 군

                영인 어영청과 훈련도감에서 대장으로 활약한 야당 유혁연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다행히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두 사람 모두 문집을 남겼다. 이들의 생애와 정책을 살필 때 유혁
                연의 <야당유고(野堂遺稿)>와 이완의 <정익공실기(貞翼公 實記)>는 효종의 군대 개혁과 북벌정

                책을 살피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실천한 주역 이완과 유혁연의 관계

                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완 공은 훈련대장, 공(유혁연)은 어영대장을 맡았는데 두 사람이 다 함께 정

                성껏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새의 두 날개와 같았다.”












                                                                        효종의 북벌정책과 독산성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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