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5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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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효종의 유업을 정조가 잇다
오산 독산성은 이야기가 풍부하다.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의 3대가 올랐던 산성으로 유명하
다. 임진왜란 당시 부왕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를 이끌며 전쟁을 지휘했던 광해군이 찾았던 곳이
며,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 독산성이다.
독산성은 제17대 임금 효종과도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효종 사후에 일어난 일이
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1760년 사도세자가 휴가를 얻어 온양 온천으로 가던 중 독산성에
올라 수원부 관아를 방문하였다. 자신의 정치적 모범으로 삼았던 효종의 영릉으로 조성될 뻔했
던 곳이 수원부 관아의 뒷산 화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훗날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효종의
영릉을 삼으려 했던 화산에 모시게 된 배경이다. 1789년 정조는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
덤을 수원부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치를 반계 유형원이 큰 도회가 들어설 터전으로 언급
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신도시 화성을 건설한다. 그리고 수원읍성과 ‘기각지세’를 이루던 독산성
을 장용영 대장과 동급의 중군이 지휘하는 산성으로 격상시킨다.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효종을 모범으로 삼았던 정조는 효종의 서거 120주기가 되는 1779년에
왕복 8일간의 여정으로 여주 영릉을 참배한다. 이때 정조는 영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남한
산성을 찾아 4일동안 머물며 병자호란의 아픔을 되새기고 주야간 군사 훈련을 벌이며 북벌을
추진한 효종을 추모하는 특별행사를 벌인다. 정조는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효종을 기념
하는 정치적 이벤트를 벌였다. 화성에 행차하거나 선왕들의 능을 참배할 때면 융복을 입고 허리
에는 효종이 사용했던 대구(帶鉤)를 착용하여 효종의 북벌정책을 계승한다는 뜻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조의 처신은 매우 상징적이자 선언적인 것이었다. 친청파가 장악한 상황
을 극복하고 북벌정책을 펼쳐나간 효종의 지혜와 용기와 결단은 즉위 초 정적으로 둘러싸였던
정조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었다.
효종의 북벌정책과 독산성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