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오산문화총서 8집
P. 119

난을 경험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수도 외곽인 경기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총융청을 설치

                했다. 수어청과 어영청을 창설하면서 훈련도감까지 중앙 군영이 네 개나 되었다.
                 이괄의 난의 후유증은 매우 컸다.
                 첫째, 평안도 방어를 책임지던 1만의 정예 병력이 반군으로 동원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

                했다. 반군 대부분과 방어하던 훈련도감의 병력 상당수가 희생되어 국방상의 큰 공백이 생겨난
                것이다.

                 둘째, 반군의 우두머리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에 투항하면서 조선군의 전략과 전술, 국방
                상의 중요한 정보가 후금으로 흘러 들어갔다. 3년이 지난 1627년 정묘호란 때 한윤은 후금군의
                길잡이가 되었다. 권력투쟁에 골몰하다가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Ⅳ. 병자호란으로 다시 주목되는 수원부 독산성





                 1627년의 정묘호란은 서인정권의 무능과 실정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10년이 지난 1636년 겨
                울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수원부와 독산성이 다시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려다가 청 기병에 의해 차단을 당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시
                작하였다. 이러한 급보를 받은 경기 방어사 구인후(具仁垕, 1578~1658)는 수원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인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하였다. 이 공으로 구인후는 전쟁이 끝
                난 후 어영대장에 올랐다. 인조는 자신을 호위한 수원의 군사 3천 명에게 각각 무명 1필을 나누

                어주고, 군사를 지휘했던 장관 70명에게 전복을 지을 옷감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호궤를 열어
                군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어 수고를 위로하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수원부의 군사
                가 인조를 호위하는 금군의 임무까지 수행했던 것이다. 속오군으로 편성된 수원의 군사는 급료

                병으로 편성된 훈련도감 군사와 달리 옷과 양식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열악한 처지였다. 그럼
                에도 “임금이 거둥할 때면 즐겁게 달려온다.”고 칭찬할 정도로 충성심이 높았다. 이런 일을 겪
                으면서 수원 군사들에 대한 조정의 기대와 신뢰는 더욱 커졌다. 구인후를 이어 수원부사에 임명

                된 조계원(趙啟遠, 1592~1670)은 군사 수를 2천 명이나 더 늘여 5천 명을 확보하였다.
                 이제 수원부의 병력은 훈련도감 병력 5천과 맞먹게 되었다.



                                                                        효종의 북벌정책과 독산성  117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