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6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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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북벌정책을 실행한 주역





                효종은 재위 10년 동안(1649~1659) 국정의 제일 목표를 북벌에 두었기에 ‘북벌의 군주’로 불

               린다. 사실 무력으로 청나라를 응징한다는 북벌은 실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정책이었다. 청나라
               의 감시를 받는 입장에서 추진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내부를 설득하는 일도 어

               려운 과제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고위 무관들조차 북벌의 대의에는 공감했으나 실현에는
               회의적이었다. 여론을 주도하던 양반사대부들은 물론 군사로 동원되거나 쌀과 옷감으로 이들
               을 지원해야 할 일반 백성들 또한 효종의 북벌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그럼에도 효종의 북벌정책

               이 실현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효종은 변방의 소수민족 만주족이 자신들의
               100배나 되는 한족이 건설한 명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인물이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북벌정책이 17세기 조선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
               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북벌정책을 추진하면서 효종이 거둔 성과는 무엇인가?



                첫째, 반정공신과 친청파의 기세에 눌려 약화되었던 왕권을 강화한 것이다.
                둘째, 공신들의 사병으로 전락해 불안하던 군대를 개혁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

               을 회복한 것이다.
                셋째, 조선 500년 역사상 최고의 개혁이라는 대동법을 확대한 것이다. 왕권의 강화와 군대의
               안정, 대동법의 실행은 영조와 정조시대의 문예부흥으로 연결된다.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삼남의 길목에 위치한 수원부와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증대되었다. 수원부는 5천의 군대가 주둔하는 경기의 중진(重鎭)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갔
               다. 수원부가 훈련도감의 전력과 맞먹을 정도의 중진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경기도 제일의 산성
               으로 평가받았던 독산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글은 효종의 북벌정책과 수원부 및 독산성의 변화발전을 정책과 인물과 사건을 통해 추적
               한 것이다. 효종의 업적을 평가할 때 주목되는 것이 효종의 인사정책이다. 가난한 백성의 편에

               서서 대동법을 확대한 잠곡 김육(金堉, 1580~1658), 국가가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내던진 백헌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무인 이완과 유혁연 같은 뛰어난 장수를 발탁한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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