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8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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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이괄의 난과 독산성
효종의 북벌정책은 병자호란의 결과인 삼전도의 치욕과 직접 관계된다.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는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공신들이 훈련도감을 개조하는 일부터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훈련대장 이흥립의 도움을 받아 반정에 성공했기 때문에 훈련도감을 단속한 것이다. 반정의 일
등공신 이귀는 인조에게 훈련도감을 방어부대로 전환하고 나라에서 정기적으로 식량을 배급하
며 도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기자고 설득한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인 이서, 김류, 신경진, 이귀
가 호위청을 창설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네 명의 대장들은 직접 군사를 모집해 군대를 자신의
사병처럼 부렸다. 이어 이귀는 어영청을 창설하고, 이서는 총융청을 창설했는데, 두 부대가 수
원을 포함한 경기도를 관할했다. 반정공신들이 병권을 장악하면서 왕의 명을 받아 군대를 통솔
하는 병조판서를 무력화시켰다.
반정공신들은 광해군 당시 정적이었던 대북 세력들보다 자신들 내부에서 갈라진 분파에서 더
많은 위협을 받았다. 서인 정권은 군사력을 국경 방어가 아니라 반란 예방에 집중하였다. 그럼
에도 1624년에 내부의 군사반란인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났다. 이괄의 난은 논공행상의 잘못
과 반정 세력들 간의 경쟁과 불신이 빚은 최악의 사태였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이후 이귀가 장
악한 어영청의 병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악재는 계속되었다. 이괄의 난이 정묘호란(1627)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경기도에 배치된 이서의 총융군은 남한산성을 방어하는데
동원되었고, 이귀의 맏아들로 수원방어사였던 이시백은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한양으로 달
려가 인조를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정묘호란 이후 서인정권은 북방의 방어력을 수도 한양에 집
중하는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이서가 지휘하는 2만 명의 총융군은 임진왜란
당시 창설된 속오군의 절반 이상을 끌어들였다. 1634년에 훈련도감은 병사 5천 명으로 늘어났
다. 수도를 방어하는 군대가 창설되고 병력이 늘어나 국내의 반란은 예방했으나 국방력 강화에
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괄의 난으로 오산 독산성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624년 2월, 이괄의 반군이 도성에 입성하기 전 한양을 벗어난 인조의 가마가 찾은 곳이 독산
1)
성이다. 독산성에서 한숨을 돌린 인조는 반란군의 추격을 피해 공주까지 피난하였다. 이괄의
1) 인조 2년 (1624 갑자) 3월 9일(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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