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3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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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와 송준길, 송시열을 죽이고자 모의했던 혐의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주모자가 처형되고, 이
어 사건의 배후인 김자점도 의금부로 압송하여 국문한 뒤에 능지처참에 처했다. 아들 김련은 형
문을 받던 중 옥사하고, 그의 모친과 처와 첩 등은 모두 노비로 끌려갔다. 김자점의 죽음과 함께
그를 추종하던 군부 세력도 모두 제거되었다. 그 여파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던 서인 공서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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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고 청서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를 ‘김자점의 옥’이라 한다. 이 사건은 수원 부사의 군사
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주목된다. 수원부사 변사기가 수원의 군대를 동원해 군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수원이 한양 도읍과 가까운데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곳이므로 비변사나 병조에서 행정과
군대를 아울러 지휘하는 수원 부사를 선발하는데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강력한 군대를 보
유한 수원이기에 부사를 무인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대한 문인들의 불만이 커졌
다. 수원의 수령도 문신들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한동안 수원
부사의 자리는 인사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부사로 제수되었다가 곧 강한 반대에
부닥쳐 명이 취소되거나, 임명은 되었지만 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갈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효종은 이완을 병조참판에 임명하고, 원두표(元斗杓, 1593~1664))를 공조판서에, 유혁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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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병사로 임명하여 북벌준비에 착수한다. 다시 이완을 북벌의 선봉으로 재편한 어영대장에
임명하여 화기 개량을 비롯해 신무기 개발과 병력 증강에 집중하였다. 남한산성의 방비를 강화
하기 위해 수어청의 군사력을 재정비하였다. 이완을 다시 어영대장으로 삼아 어영청 군사를 크
게 늘렸다. 한성에 있는 어영청군은 종래 약 7,000명의 3개월 근무하는 군대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2만 1,000명으로 늘리고, 한성에는 1,000명이 상주하도록 하였다. 국왕의 친위병인 금군
을 전부 기병으로 조직하였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기병을 강화하고, 어영청에 대포부대인 별
파진을 창설하였다.
3)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 12월 13일 병진
4) 지두환, 2001, 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85쪽
효종의 북벌정책과 독산성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