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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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원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 금주 공격에 참전하게
되자 세자와 봉림대군을 시종한 무인이다. 이때 조계원은 모래주머니를 이용하여 성을 쌓는 기
발한 계책을 써서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조계원의 노력으로 수원
의 상비 병력이 5,000명 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독산성은 병자호란 후 산성중에서 가장 먼저 정비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는 강화도와 황해도, 평안도의 산성에 설치한 방어시설인 성가퀴를 모
두 철거하였다. 불과 1639년에 독산성을 크게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위치가 한양 이남에 있었
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 독산성을 보수한 것은 군사정책을 수립하던 비변사의 전략적 판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조시대에 훈련대장과 수원부사의 위상이 엇비슷했는데 이 또한 수원의 전략적 위치
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부각되었다.
인조시대의 서인은 어영대장 이귀와 총융사 이서를 중심으로 하는 소서(少西)와 도체찰사 김
류와 도원수 김자점이 이끄는 노서(老西)로 나뉘어 대립하고 갈등하였다. 이들의 대립 구도에서
군영을 누가 장악하고 있었는지 파악해야 역학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인조 말년에 정
치권력은 친청파 김자점에게 넘어갔다. 군권은 어영청 제조인 김자점과 수어청을 지휘하는 이
시백, 총융청을 지휘하는 이시방 형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Ⅴ. 효종이 신뢰한 수원의 군대
효종은 조선 후기에 가장 주목해야 할 왕이다. 효종이 재위한 10년 동안에 조선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병자호란에 패하여 형 소현세자와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봉림대군(효종)은 청
나라 군부의 사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1641년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산해관 밖 송산·금주 전투에 종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봉림대군은 소수 정예의 조선
총포병의 역할에 주목한다. 이 당시 조선군을 지휘한 대장이 유혁연의 종조부인 유림 장군이었
다. 봉림대군은 수도 심양에서 지내고 종군하여 팔기군의 전투까지 체험하면서 북벌을 구상하
였다. 형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청나라의 정복 전쟁도 참관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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