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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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무향, 수원





                북벌정책이 추진되면서 실력이 뛰어난 무인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

               되면서 군사들의 사격술과 창검을 다루는 무예 실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효종은 국왕이 친림한
               자리에서 무예 실력을 겨루는 관무재를 다시 열었다. 관무재는 실력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

               할을 했다. 효종은 관무재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둔 무사에게는 변장을 제수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군사들에게는 면포를 부상으로 내려 사기를 높였다.
                효종은 병기와 군장을 갖춘 5,000명의 정예병을 보유한 수원을 주목하였다. 임금의 관심에

               호응하여 군사 훈련이 더욱 강화되고 무예 실력이 향상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효종은
               “수원의 군사가 훈련도감 군사보다 더 낫다.”고 평가하여 수원 무사들의 충성도를 공개적으로
               칭찬하였다. 효종은 “임진왜란 이후 수원을 무향(武鄕)이라 부른다.”며 군사들을 제대로 대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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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것을 신하들에게 당부하기도 한다.  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수원이 무향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효종이 북벌정책을 펼치면서 상무의 문화가 확산되었다. 그 중심에 수원과 독산성이 있
               었다.

                1655년에 수원부 소속 무사를 대상으로 무예를 시험하였다. 부상으로 면포 7백 필과 쌀 1백
               석을 수원부로 수송하여 시재에 입상한 군병들을 시상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대규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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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재에 독산성에 소속된 군병들도 참여했을 것이다. 조정
               에서 수원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처럼 독산성도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폈듯이 친
               청파 김자점을 옹호하는 역모사건의 핵심으로 수원 부사 변사기가 처형된 것이 불과 4년 전의

               일이다. 수원의 군대를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조정을 든든하게 보위할 수도 있고, 나라를 위
               태롭게 만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8) <승정원일기> 효종2년(1651) 10월 25일
               9) 효종실록 10권, 효종 4년 3월 2일 무진 1653년



               124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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