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7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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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기병 강화와 관무재





                 효종은 경기도 군사의 집결지인 남한산성을 요새화하는 작업도 서둘렀다. 효종 6년(1655) 1월

                에는 남한산성에 대량의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그리고 창덕궁 후원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금군
                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금군은 기병으로만 편성된 호위부대인데, 북벌을 실행할

                때 효종을 호위할 군대였다. <국조보감>을 보면 “금군 좌우별장을 불러 금군을 나누어 영솔하
                게 하고 친히 금중에서 그들을 시험하고 사열도 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1656년에 효종은 유혁연을 어영대장에 제수하고 형조참판을 겸임하도록 했다. 이때 유혁연은

                호패 제도를 먼저 실시하도록 건의한다. 호패제도를 통해 군사로 확보할 인원을 체계적으로 관
                리하려는 것이다. 한편 효종은 훈련대장 이완에게 훈련도감 군사를 1만 명 수준으로 늘이도록
                지시하였다. 그 사이 가뭄을 비롯한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워져 북벌을 추진하는 정

                책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1657년 12월에는 우암 송시열에게 초구(貂裘: 담비 가죽으로 만
                든 외투)를 하사하여 북벌의 의지를 천명하고, 호남 산간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청나라 조정이 차츰 안정되면서 북벌의 실현성은 더욱 어려워졌다.

                 효종은 어영대장 유혁연의 건의를 받아들여 금광을 개발하고 새로운 무기를 제작하도록 지시
                하였다. 임금이 참관하고 직접 시상하는 무예 시험 ‘관무재(觀武才)’를 통해 사기를 진작시켰다.

                또한 선왕들의 무덤을 찾는 능행(陵行)을 활용해 진법을 비롯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효종은
                강궁과 언월도 같은 병기를 제작하여 창덕궁 후원에서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무예를 익히며 상
                무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해 군사들의 실력과 충성심이 높아졌다. 평안도, 함

                경도 지역의 속오군 소속 군사들이 러시아 정벌에 두 차례 참여하여 두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를 통해 조선 군사들의 사격술에 청나라 군사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훈련대장 이완과 어영대장 유혁연은 효종의 뜻대로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던 군대를 북벌대의
                로 설득하여 하나로 통일시킨다. 이완은 서인, 유혁연은 남인이지만 서로 협력하였다. 두 대장
                은 기찰을 풀어 서로의 약점을 찾아내던 오래된 폐단을 단호하게 금지하고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두 대장은 국왕의 깊은 신뢰를 얻었고,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훈련대장 이완은
                무인 출신으로 정승에 오를 정도로 실력과 인품을 두루 겸비한 장수였다. 이완과 호흡을 같이한
                어영대장 유혁연은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대장을 지냈으며 궁술만을 중시하는 일반 장수

                들과 달리 검술 실력도 빼어났다. 시(詩), 서(書), 화(畵)에도 뛰어났던 유혁연은 <야당유고>라
                는 문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력까지 갖춘 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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