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1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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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워 땅에 세워 적의 화살을 막았기 때문에 입방패라고 하였다. 길이 5척6촌(118cm), 너비 2

                척2촌(46cm), 두께 7푼(1.5cm), 무게 3.75kg이다. 그런데 『난중일기』를 비롯한 임란 당시의 기
                록을 보면 이 방패로는 조총 탄환을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두 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
                서 독산성에서도 기존의 방패에 나무를 덧대는 방식으로 보완했을 것이다. 당시의 여건상 독산

                성 전체에 성가퀴를 설치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가퀴가 없거나 허물어진 곳에
                는 방패를 설치하여 적의 조총 사격에 대비했을 것이다.



                창



                 창은 무과 시험에서 말을 달리며 사용했던 것으로 길이가 10척(4.5m)이 되는 긴 창이다. 창은
                성을 지킬 때는 물론 평지 전투에서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기병이 돌격해올 때 장창은 유용한
                방어 무기였다. 창을 든 병사는 성가퀴 옆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쏠 수 있는 타구로 창을 넣어 성

                을 기어오르는 적을 제압했다. 백병전을 벌일 때 창은 검보다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독
                산성전투에서도 창을 사용해 적을 막아냈을 것이 분명하다.



                검



                 창과 마찬가지로 백병전을 벌일 때 사용하는 병기이다. 전투할 때 대열의 맨 앞에 서서 길을
                여는 방패수들이 반드시 검을 휴대했다. 방패수를 보호하는 것은 뒤따르는 창수들이다. 창과 방
                패는 서로 협력하며 서로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조선의 무사들은 임란 때까지 궁술을 중시할

                뿐 검술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을 사용해서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대부분
                빠르게 쏠 수 있는 활을 사용했다. 그러나 적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거나 맞붙는 경우에는 부득

                불 활을 버리고 검으로 상대해야 한다. 많지는 않지만 검술에 뛰어난 장수들에 대한 기록이 남
                아 있다. 이치전투를 승첩으로 이끈 황진 장군은 통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거금을 들
                여 왜검을 두 자루 구입해 왔는데, 의형제를 맺은 이종인도 검술에 뛰어났다.



                돌과 바위



                 독산성전투의 실상을 알기 위해 행주산성전투의 경과를 기록한 『선조실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선조 26년 2월 24일자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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