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6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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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으며 파상적으로 공격하는 적을 물리
치고 끝내 진주성을 사수해냈다. 진주성에 치욕을 맛본 왜군은 1593년 6월에 10만의 대병력으
로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치와 독산성에서 활약했던 황진 장군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
천일(金千鎰, 1537~1593)과 함께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김천일과 황진은 독산성
을 무대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전공을 세운 공통점이 있다. 이치와 독산성, 진주성 전투
의 영웅 황진 장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황진은 권율보다 더
많은 칭송을 받았던 장수였다.
권율은 이치전투의 승리로 전공을 인정받아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했다. 황진도 익산군수 겸
전라도 조방장으로 승진했으니 이치전투는 두 장수에게 명예와 출세의 기회였다. 권율은 전열
을 가다듬고 임금 선조를 호위하고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했다. 수원에 도착한 권율
은 체찰사 정철의 권유를 받아들여 더이상 북진하지 않고 독산성에 주둔하기로 결정했다. 대군
이 한양과 가까운 곳에 주둔하는 것만 해도 왜군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
수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이 안성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의병장 최흘이 수원과 오산에서 활
약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수원부사를 지낸 의병장 김천일이 독산성에 주둔하면서 지역의 치
안을 유지하고 적에게 붙은 반역자를 처단하여 민심을 안정시켰기 때문에 주변의 백성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독산성에 주둔한 군대의 주력은 전라도 병력이지만 지역의 지
리에 밝은 경기도의 관군과 의병들이 함께 있었다.
1592년 12월, 왜군이 경기도와 한성을 점령한 지 반년이 지났다. 왜군은 큰 고을의 관아와 성
을 점령하고 있었다. 오산과 수원 사이에 있는 독산성에 조선군 대부대가 웅거하고 있다는 정보
를 받은 왜군 지휘부는 후방의 보급로와 연락망을 지키기 위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의 군
대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한성을 점령하고 있던 정예의 왜군들이
경기도의 병력과 합세해 독산성을 포위하였다. 다행히 독산성을 지키는 장수는 이치에서 왜군
과 혈전을 벌여 물리쳤던 경험을 가진 권율과 황진 같은 장수들이다. 아군의 서너 배가 되는 왜
군들이 성을 포위했다. 수원읍성도 적이 점령했다. 이제는 물을 길으러 산 아래로 내려가기도
어렵게 되었다. 왜군은 처음에는 집중 공격을 시도했다. 조총으로 집중사격하여 성 밖으로 고개
도 들지 못하도록 한 뒤에 긴 칼을 뽑아 든 왜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벽으로 달려들었다. 다행
히 경사가 심해 속도를 내서 달리기 어려웠다. 적이 성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활을 쏘고 섶
에 불을 붙여 굴렸다. 지난 6월 용인에서 전라·충청·경상 삼도의 6만의 대군이 채 2천도 되지
않는 왜군들에게 무참히 패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때 정찰을 나가 있던 황진의 부대는 병
력을 전혀 손상당하지 않고 질서 있게 퇴각하여 이치에서 권율의 부대와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
164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