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4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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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독산성전투의 모습을 그리려면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430년 전 조선의
군사제도와 생활문화, 당대의 관련 사료를 최대한 참고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공식 문헌에
근거를 둔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를 위해 조선시대에 펴낸 병서와
임진왜란을 깊이 분석한 논문집을 참고했다. 조선시대 군사제도를 뒷받침하는 법률과 제도, 전
투경과를 다룬 『선조실록』의 기록, 그리고 전투를 분석한 논문을 통해 전투의 실상을 추론해 보
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상상력을 펼치다보면 독산성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며, 한결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물론 이런 상상력을 동원하는 까닭은 독
산성전투에 관한 역사기록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이 글은 역사적 상상력을 펼칠 때 도움이
되는 단서와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논문 형식이 아니라 문답식의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택했다. 필자가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과감히 시도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첫째는 재
미있게 독산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고, 둘째는 독산성에 관한 기존의 지식과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Ⅱ. 독산성전투 : 이치전투와 행주산성전투 사이
독산성전투는 1592년 7월의 이치전투와 1593년 2월의 행주산성전투 사이에 치러졌다. 그 사
이 전황은 크게 달라졌다. 전쟁 초기 관군은 육전에서 패전을 거듭했으나 이치전투와 진주성전
투에서 보듯이 수배에 달하는 왜군의 집중 공격을 물리치고 조선군이 승리했다. 이처럼 전투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육군도 왜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게 되었다. 왜군의 전술을 파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군은 당연히 수전에 강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취약했던 반면 육전에 강할 것으
로 예상했던 조선보다 왜군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초기에 와해되었던 관군도 전열
을 가다듬고, 지역에 기반을 둔 의병과 공조하며 왜군과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을 회복했던 것이
다.
1692년 6월, 한양은 왜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조정은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다. 왜군 선봉은 평
안도와 함경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 군정(軍政: 조선분거(分居)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왜군 지휘부는 유일하게 점령하지 못한 전라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이순신이 이끄
162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