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3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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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임진년 겨울의 독산성 풍경





                 독산성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매년 현장을 답사하고 틈틈이 옛

                문헌을 뒤적이며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임진년 겨울에 벌어진 독산성전투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지를 명쾌하게 알려주는 책이나 논문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한성 수복을

                위해 전라감사 권율(權慄, 1537~1599)이 전라도에서 이끌고 북상한 병력은 2만으로 알려져 있
                다. 그러나 2만이라는 병력은 부풀렸던 것으로 보인다. 적을 위협하고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
                해 흔히 병력을 여러 배로 과장했던 기록은 『선조실록』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여러 가지 상황

                을 고려할 때 권율이 거느린 병력은 1만 정도로 보인다. 예컨대 1593년 2월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길 때 권율은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1550~1598)에게 4천 명을 주어 금천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2천3백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입성했다는 기록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독산성을 지

                킬 병력도 1~2천은 남겼을 것이기 때문에 대략 1만으로 추산할 수 있는 것이다. 경기도 출신이
                포함된 1만 내외의 대군이 독산성에 두달이나 주둔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물음을 던져보자. 그
                많은 군사들이 작은 성안에서 어떤 일을 하며 하루 일과를 채웠을까, 어디에서 자고 끼니는 어

                떻게 마련했으며 샘물도 부족했다는데 식수를 어떻게 마련했을까, 왜군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
                해 올 때 어떠한 전술과 무기로 방어했을까, 매복과 기습작전을 펼쳤다는데 어떤 장수가 이러한

                작전을 주도했을까. 이러한 궁금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솔직히 현재의 성곽 모습으로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자연 환경만 따
                져도 430년 전 임진년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성벽 주변의 나무를 모두 잘라내

                어 성에서 50~60m 이상 훤히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투를 벌일 때 적이 50보(60m) 전방
                에 나타났을 때 일제히 활을 쏘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성벽에는 여장(女墻) 혹은

                타(朶)로도 불리는 성가퀴가 둘러싸고 있었을 것이다. 성의 핵심 시설인 성가퀴는 적이 쏘는 총
                탄이나 화살을 막아줄 뿐 아니라 적을 공격할 때 몸을 숨기고 활이나 화포를 쏠 수 있다. 따라서
                성에 성가퀴가 없다면 성으로서의 기능이 거의 없는 것이다.

                 권율은 이치와 독산성에서 적을 막아내고,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군을 잘 막아낸 전공으로 조
                정의 주목을 받아 도원수에 올랐다. 권율은 패전을 거듭하던 육전에서 연거푸 세 차례나 승리했
                던 빼어난 장수였다. 이런 까닭에 권율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으나 이치전투에서 맹활약한 황진

                (黃進, 1550~1593)이나 독산성에서 활약한 선거이 같은 장수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
                의 전공이 권율 한사람에게로 집중되면서 전투의 실상도 가려진 감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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