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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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 1750년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던 영조는 한양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독산성에 올랐었다.
1760년에는 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하였다가 한양으로 돌아가던 도중 장마로 인해 황구지천(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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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池川)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에 올라가 하룻밤 유숙(留宿)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사도
세자는 독산성을 둘러보고 전략적 가치를 평가하며 창고의 쌀 20석을 내어 호위하는 군병에게
나누어주고 성내 민인(民人)을 공궤하게 하였다. 13)
정조는 현륭원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선정하면서 독산성이 아버지 사도세자가 유숙하였던 유
적지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독산성에 올라가서 산성의 형편을 살펴보았다. 현륭원을 조성하면
서 독산성을 그대로 둘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자 정조는 현장을 찾았다. 1790년 2월 원행에서
독산성을 방문하여 사도세자가 머물렀던 운주당에서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가 하고 묻고 답을
들은 후 성안의 민호마다 미포(米包)를 지급하며 사도세자가 머물렀던 경진년의 일을 추념하였
다. 1792년 장마로 산성이 반 이상이 무너져 내렸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바로 보수하게 하였다.
독산성 공역을 시작할 때 토지신에게 올리는 고유문(告由文)을 직접 짓고 고유제의 절차와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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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도 직접 지시하였다. 이는 사도세자 유적지 정비라는 점 외에도 이듬해 창설되는 장용외
영의 근거지를 정비하였으며 1793년 1월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유수는 장용외사를 겸
하게 하였는데 군영은 주둔지에 성을 갖고 있는 예에 따라 독산성을 수축하였고 곧이어 진행되
는 화성성역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15)
2. 궐리사성적도(闕里祠聖蹟圖)
오산시궐리사에는 공자문화전시관이 있고 그 안에 공자성적도(公子聖蹟圖) 목판이 소장되
어 있다. 궐리사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그림으로 새긴 목판이다. 성적도의 원 자료가 되는 것
은 공자에 대한 전기(傳記)물 들이다. 최초의 공자전(孔子傳)은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며, 공자 제자들의 일을 서술한 같은 책에 실린 「중니제
10) 『仁祖實錄』卷5, 仁祖 2年 3月 9日, 癸亥, “聞大駕幸水原 禿城”
11) 『英祖實錄』卷72, 英祖26年 9月 26日, 乙丑, “上過水原, 登禿城山城”
12)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신구문화사, 2009, p341
13) 『화성지(華城誌)』卷2, 「산성」독성.
14) 『弘齋全書』卷22, 제문4.
15) 정해득, 위의 책, p.351.
“오산시궐리사”와 “궐리사성적도” 문화재 명칭에 관한 제언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