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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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수원(현재 오산시와 화성시 일대 포함)의 옛 지명이 ‘모수’, ‘매홀’, ‘수주
(水州)’, ‘수성(水城)’ 등으로 불렸던 배경에는 황구지천의 물과 독산성이 결합되었음을 알려준
다. 심승구(2012)의 연구에서는 독산에 성을 쌓아 보장처의 기능이 강화되어 군사적 기능이 담
긴 ‘수성’으로 발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자 권율
(權慄, 1537∼1599)장군이 10월에 수원의 독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가 왜군과 맞
닥뜨렸다.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권율이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성에 주둔하던 왜군을 급파하여 독산성을 포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군을 성 밖으로 유
인하거나 성을 직접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전투가 있었던 독산성은 세마대(洗
馬臺)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성에 물이 부족한 것을 알아차린 왜군이 산성을 포위하자 높은 대
에서 쌀로 말을 씻어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여 포위를 푼 왜적을 뚫고 북진하였다는 일화이다.
실제 독산성전투에서 승리한 결과로 한수 이남의 서로(西路)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후 국방상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전까지 독산성에 대하여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조선은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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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남한산성, 금천의 금지산 등과 호남을 방어하는 요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는 독산성
전투 단독의 승전만의 의미가 아니라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며 한양을 탈환할 수 있었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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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기 산성 방어체계를 강화시킨 계기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독성산성의 특징은 이정구(1564년~1635년)의 「독성산성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9)
“성이 넓을 들판 가운데 있어서 험준하게 막힌 곳이 없고, 산이 우뚝하게 길옆에 솟았는데, 숲이 없어서
바라보기에 밋밋하다고 독성이라고 부른다. 모두들 예사로 보고 별로 이상하게도 여기지 않았는데, 임
진년 왜구가 크게 들이닥쳤을 때 도원수 권율이 여기저기서 싸우다가 이 성에 들어와 점거하여 적병을
여러 번 물리쳤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이 성이 중요한 자리에 있어 나라 안의 요충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산성은 조선 후기 국왕과 왕세자의 행차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인조
는 1624년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을 피해 공주로 향하던 길에 독산성에 잠시 행차하였
6) 오산학연구소, 2019, 『오산학연구(Ⅴ)』, p.42.
7) 심승구, 2012, 「임진왜란 중 독산성 전투와 그 역사적 의의-전술적·전략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국학논총』37권, p.141.
8) 위의 논문, pp148~149.
9) 『萬機要覽』 軍政篇4, 關防, 李廷龜禿城山城記
118 신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