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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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岺)이라 이름 지어졌다.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24굽이 고개가 장관이다.



                 위의 자료를 근거로 도마치를 ‘병자호란, 광교산 전투’에서 생겨난 지명으로 추정한다.
                 광교산 전투의 당일, 청군의 좌익장 양고리는 5,000의 기병으로 도마치를 공격하였던 것으
                                    38)
                로 추정한다. 양지(陽智) 에서 광교산을 지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전라감사 이시방의 군사
                6,000명을 막은 것으로 판단한다. 설명을 덧붙이면 전라병사 김준룡 장군과 청군 사령관 다탁

                이 전투를 벌이는 사이, 전라감사 이시방과 승병장 각성의 전라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갈
                것을 예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청의 좌익장 양고리는 도마치를 공격하여 전라근왕군의 진격
                을 막았던 것이다.

                 그런데 광교산 전투의 의문은 전라감사 이시방의 행동이었다. 이시방은 광교산 전투를 지원
                하지도 않았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청군의 용장 양고리의 기마군
                의 전투력이 어마무시하였던 것이다. 험천전투에서 패퇴한 충청병사 이의배로부터 전황을 전해

                듣고 공포에 떨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마도재(馬道岾)는 도마치(刀馬峙)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
                이다.
                 1960년대에도 대장간과 주점이 있었던 도마치에는 수지IC가 들어섰다. 용서고속도로의 출발

                점이자 용인~성남 남한산성~서울을 잇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마치는 말
                과 자동차의 통행을 제한하는 구간이다. 필자는 지명 말구리, 소말구리, 도마치를 김준룡 장군

                이 청의 기마병을 물리친 장소로 판단한다.






















                                                 도-16 도마치(수지IC)



                38) 양지(陽智), 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의 옛 지명 양지현(陽智縣).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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