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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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광교산 전투는 전라근왕병의 승리였다





                1. 淸實錄과 淸史考의 기록



                 병자호란, 광교산 전투의 과정은 淸實錄과 淸史考에 자세하다. 조선왕조 인조실록은 병자호

                란 최대의 전적인 광교산 전투의 승전을 기록하지 않았다. 승전국 청의 시선이 두려워 후퇴의
                아쉬움만 기록하였다.
                 전란 후, 인조는 전라근왕병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김준룡 장군을 파직하였다. 조총과

                화약, 군량과 원군이 뒤따르지 않아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던 상황은 무시했다. 이것 또한 광교
                산 전투를 지원하지도 못한 조선 정부의 무능을 핑계한 가림막이었다.
                 광교산 전투가 벌어진 날은 1637년 1월 6일이었다. 그런데 청실록과 청사고는 1월 7일 丁未로

                기록하였다. 1월 6일~1월 7일에 벌어진 전투를 1월 7일에 묶어 기록한 차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대동야승』, 『청실록』, 『청사고』가 기록한 당일의 날씨가 증명한다.
                 『조선왕조실록』은 1월 6일 丙午의 날씨를 “사방에 운무(雲霧)가 끼어 하루종일 어두웠는데 지

                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고, 『승정원일기』는 “하루종일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고, 『대동야승』은 “비와 눈이 섞여서 내려 종일토록 어두웠다.”고

                기록하였고, 『청실록』과 『청사고』는 “눈이 내려 날이 흐리고 어두웠다.”고 기록한 것에 근거한
                다.
                 『청실록』과 『청사고』의 차이는 단 한 군데다. 청의 장수 양고리가 죽은 장소의 기록이 다르다.

                청실록은 적장 양고리가 石窟(석굴)에 매복하였던 조선군 한 명이 쏜 조창(조총)에 맞아 죽었다
                고 하였고, 청사고는 적장 양고리가 崖側(애측)에 매복하였던 조선군의 조창(조총)에 맞아 죽었

                다고 하였다.
                 필자는 청실록과 청사고의 기록을 자세히 읽고 광교산을 10여 차례 답사하였다. 그리고 광교
                산 전투의 과정을 추적하였다. 다음은 淸實錄과 淸史考가 기록한 광교산 전투의 과정이다. 길공
                                   24)
                구의 역주 ‘광교산 전투’ 를 참조하였다.








                24) 광교산 전투, https://cafe.naver.com/booheong/159029, 길공구 譯註.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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