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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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봉안역에서 남한산성의 정부군에 장계를 띄워 근왕병 출격 사실을 알렸다.
12월 26일, 강원근왕군은 검단산에 올라 횃불과 포성으로 남한산성의 관군과 연락을 주고받
았다. 그러나 며칠 뒤 춘천영장 권정길의 군사도 청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퇴각하였다. 검단산
전투에서 전사한 강원근왕병의 수효는 약 200명이었다.
5. 쌍령 전투의 패전
강원군 다음으로 청군과 격돌한 군사는 경상근왕병이었다. 경상감사 심연(沈演), 좌병사 허완
(許完), 우병사 민영(閔栐)이 근왕병을 이끌었다. 허완과 민영은 경기도 광주군의 쌍영(雙嶺)에
진을 쳤다. 험천 전투에서 패전한 충청병사 이의배의 군사도 경상근왕군에 합류했다.
정축년(1637년) 1월 2일, 청군 사령관 예친왕 다탁(多鐸, Dodo)이 요토(Yoto)의 기마군단을
출격시켰다. 1월 3일, 요토의 기마병은 쌍령에 진을 친 경상근왕군을 무참하게 격파했다.
쌍령 전투에서 춘천영장 권정길의 아우 권임길이 전사했다. 의병장 김홍익 또한 전사하고 의
병장 이민진은 청군의 포로로 잡혀 항거하다 처형되었다. 험천전투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쌍령
전투에 참전하였던 충청병사 이의배도 전사하였다. 무장답게 전장에서 산화하였다.
『연려실기술』은 ‘허완과 민영의 경상근왕병이 4만 명이나 되었음에도 청군의 기병에게 여지없
이 참패를 당했다’고 기록하였다. 전투에 있어 청군 기마병의 전투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증명하는 싸움이었다. 쌍령 전투에서 희생된 경상근왕병은 약 3,000명이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이 서둘러 의병을 일으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처럼 의병이 활
발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강홍립이 인솔하였던 1만 3,000명의 조·명 연합군의 패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반정과 공신 다툼으로 발생한 이괄의 난, 이괄의 난 때 역모 혐의를
22)
23)
받고 후금에 망명한 한윤(韓潤) , 정묘호란 때 후금에 투항한 정명수(鄭命壽) 의 배반 등이 원
인이었다.
22) 한윤(韓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아버지 한명련이 살해되자 탈출하여 구성(龜城)에 숨었다. 이
듬해 정부군의 추적을 당하자 후금(後金)의 건주(建州)로 도망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의 군대에 종군하여 조
선 공격에 앞장을 섰다.
23) 정명수(鄭命壽), 1618년(광해군 10) 명(明)이 후금(後金)을 토벌할 때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조선 원병으로 참전하였다가 후금
의 포로가 되었다. 이듬해 조선군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후금에 눌러 살며 그들의 말을 배우고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밀고해 신임을 얻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해 조선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 뒤 청의
세력을 믿고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해 영중추부사까지 올랐다.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