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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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화 전투의 패전
1637년 2월 5일, 청군은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리고 홍이포(紅夷砲)를 쏘아 남한
산성을 수차례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이 완강하게 버티자 청군은 전략을 바꿨다. 인조의 항
복을 쉽게 받아내기 위한 인질을 잡으려고 하였다. 청 태종 황타이지는 예친왕 도르곤으로 하여
금 소현세자가 대피한 강화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청군이 강화도에 접근하자 충청수사 강진흥이 군선으로 청군의 작은 배를 연이어 침몰시켰
다. 이에 청군이 홍이포를 쏘아 조선의 군선을 하류로 밀어냈다. 그리고 썰물 때를 이용하여 작
은 배 수십 척으로 염하(鹽河)를 도강하였다. 이어 강화도 진해루를 점령하고 강화산성을 함락
하였다.
이때 강화도 수비를 맡은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 부사 이민구가 도주해버렸다. 강화산
성에 피난하였던 왕자와 비빈들이 청군에 붙잡혔다. 소현제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남한산성으로 전해지자 인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인조는 더 이상의 항전을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결국 항전이 아닌 항복을
선택하였다.
2월 24일, 조선왕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신하
의 의식을 치렀다.
도-5 강화도 염하 진해루 도-6 삼전도비
68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