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3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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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종합해보면, 이의풍은 수원에 부임하여 관원들을 엄하게 다루
다가 서리 80여 명이 집단으로 관아를 이탈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경기감사로부터 사건을 보고
받은 조정은, 깐깐한 부사 이의풍을 교체하려고 서리들이 작당한 사건으로 파악하고, 이들의 책
략에 말려들어서 이의풍을 파면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건을 보고받은 사도세
자도 이러한 신하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처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이의풍이지만, 일 처리에 뛰어나 박문수의 강력한 후원과 영조
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기에 수원부사로 재직하다가 어영대장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에 죽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이때로부터 7년이 지난 1760년 온양 온천에 행차하는 길에 독산성을 찾는다. 진
남루에 올라 활을 쏘고, 효종이 묻힐 뻔했던 수원부 관아의 진산인 화산에 올랐으며, 운주당에
서 하룻밤을 지냈다. 1753년 당시 강호보의 나이는 64세, 사도세자는 19세였다. 생년은 알 수
없지만, 도총관에 오른 이의풍의 나이도 강호보와 비슷했을 것 같다.
월15일(음) 12월 14일 영의정과 좌의정이 함께 입시하였을 때에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수원부사 이의풍은 저번 관리배
가 도망한 일로 올라와버려 경기감사가 장문(狀聞)하였는데 조정에서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라 서둘러 도로 내려 보냈습니다.
대개 이의풍의 정사가 비록 강직하기는 하였지만 본성이 아래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은 아닌데 수원은 다른 고을에는 없는 잘
못된 관례가 있어 서리와 노비와 관속(官屬)들이 환자를 받아먹고 가을이 되면 민간에게 할당하여 대신 바치게 하는 것입니
다. 이 같은 참혹한 흉년을 맞이하여 자기가 받아먹은 환자도 챙기기 어려워 걱정인데 관속의 환자는 결코 대신 바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게 엄히 신칙하는 영을 내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크게 원한을 품고 도망치기에 이르렀
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입니다. 저번에 한 대신이 학정 등의 말로써 파직시킬 것을 진달하였으나 소조(小朝:사도세자)에서 허
락하지 않자 다른 대신이 바로 정달(停達)하였습니다. 그가 이 일로 또 올라와 기어이 체직하려 하는데 지금 허락하여 교체한
다면 이들이 꾸민 쫓아내려는 계략에 맞추어 주는 것이 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이번에 대신의 진달이 없었다면 오히려 서
서히 허체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대신의 진달이 있은 뒤라서 단연코 허체할 수 없습니다. 비록 수령 한 사람의 일일지
라도 풍기(風紀)와 교화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감히 진달하옵니다. 그 직임은 체개하지 말고 서둘러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아뢴 바를 들으니 이는 전에 들은 말과 다르다. 그를 허체한다면 이는 간사한 서리들
의 계책에 맞추어 주는 것으로 풍화가 이로부터 실추하게 될 것이다. 그를 신칙하고 즉시 내려가게 하라.”하였다.
독산성 복원을 향한 첫걸음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