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5 - 오산문화총서 7집
P. 195

중영장 김경유는 진남루를 보수한 실행방안을 이의풍에게 건의하여 진남루 수리를 맡게 되었

                을 것이다. 김경유는 강호보보다 8살 연하이다. 김경유의 아내 강씨와 강호보가 같은 집안이었
                으니 일찍부터 서로 알고 지냈을 수 있다. 무인이지만 서예와 문장에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경유가 당시 상당한 명성을 날리던 강호보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무튼

                여러 가지 상황을 비춰볼 때 강호보는 이의풍보다 김경유와 더 친밀한 관계였던 것 같다.







                Ⅹ. 정조가 만난 독산성





                 이제까지 두 개의 글을 중심에 두고 독산성을 주목한 사람, 요새로 만드는 일에 헌신한 사람

                들을 만나 보았다. 이처럼 독산성은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럼 그 이후 독산성은 어떤 모
                습이었을까?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정조이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아버지 사도세
                자의 묘소를 천하명당 화산으로 이장하고, 5개월이 지난 1790년 2월에 독산성에 올랐다. 이러

                한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정조실록』을 함께 읽어보자.



                    임금을 태운 가마[御駕]가 독성산성에 나아가 장대(將臺)에 올라갔다. 운주당에 이르러 산성의 부로(父
                    老)들을 불러 위로하기를, “그대들 중에는 나이 많은 노인이 많으니 경진년(1760)에 어가가 머물렀을 때
                    구경한 사람이 있겠구나.” 하니, 부로들이 아뢰기를, “경진년에 온천에 행차할 때 어가가 운주당에 머물
                    러 숙소로 삼았는데, 신들은 거의 다 의장(儀仗)들을 반갑게 쳐다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일을 너희들은 기억하고 있는가?” 하니, 부로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어가가 머무른 날에 친히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보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려주었으며, 진남루에 올라 과녁을 쏘아 연거푸 4발을
                    맞추었습니다.” 하였다.    44)



                 아버지 사도세자가 독산성을 찾은 지 30년 만에 아들 정조도 독산성을 방문해 아버지가 활을
                쏜 진남루에 오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룻밤을 지낸 운주당에서 나이가 많은 지역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아버지를 추모하는 아들의 갸륵한 마음을 읽은 노인들은 한목소리로 사도세자





                44)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1790) 2월 10일 신유


                                                                       독산성 복원을 향한 첫걸음  193
   190   191   192   193   194   195   196   197   198   199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