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6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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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선행을 들려준다. 아버지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백성들의 말에 고무된 정조는 아버지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에게 한 자급씩 품계를 올려주고, 성안 백성들의 집마다 쌀 한 섬씩을 나누어주
고, 화성 득중정에서 활을 쏘아 아버지처럼 네 발을 맞춘다. 정조가 독산성을 찾아 벌였던 행사
또한 독산성을 복원할 때 참고해야 할 자료이다. 다음은 독산성을 수리한 내용을 알려주는 기록
이다.
독성산성을 수축하였다. 성의 주위는 1천4보로 전체 성 중 신축 부분이 732보, 수축한 부분이 272보이
다. 수문은 세 곳을 개축하였고, 성가퀴도 309보를 신축하였으며, 남장대는 옛터에서 3척을 옮겨 다시
세웠다. 전교하기를, “산성은 중요한 요해지이고 원침에서 가깝다. 또 경진년에 (사도세자가) 머물러 숙
박하였던 곳이며 장대는 바로 진남루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곳이다. 지금 수리를 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내려야겠다. 원임 각신들 중에서 적임자를 좌상이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45)
이때 “남장대는 옛터에서 3척 옮겨 다시 세웠다.”는 문장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산사태
로 성벽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남장대가 서 있던 곳에서 안쪽으로 건물을 옮겨 세웠다는 것이
다.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한 1793년에는 남양부에 소속된 독산성에 경기좌방영을 옮기고, 방
어사에게 토포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ⅩⅠ. 230년 전 독산성의 모습을 그려보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발굴조사가 마무리되면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진남루와 운주당을 비롯
한 건축물과 핵심 방어시설인 성가퀴를 복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기를 기준으로 복원해
야 할까? 먼저 1,500년 전 삼국시대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보존
된 성벽 일부를 제외하면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
다음은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때도 성곽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진
남루가 완성된 1603년이 독산성이 기본 모습을 갖춘 해이다. 이후 몇 차례의 보수공사가 이루
45)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1792) 10월 3일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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