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4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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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진남루를 보수한 주역 김경유
사양재의 「독성산 중수기」는 월사 이정귀가 1603년에 「진남루기」를 지은 지 꼭 150년이 지나
1753에 쓰인 글이다. 「독성산 중수기」는 짧은 글인데다 특별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지만, 독산성
의 관리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진성(독산성을 말함)의 남쪽에 오래된 누각이 있는데, 진남루라 부른다. 세월이 오래되어 흙다리가 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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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위태로워 오를 수가 없다. 부족한 내가 고을을 다스리러 왔다가,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수리할
뜻이 있었다. 이에 무리 중 중영장 김경유가 (수리할 수 있는) 방책을 내서 김경유에게 그 공사를 맡기
니, 김경유는 곳간 곡식을 조금 덜어 써서 낡은 재목을 바꾸는데 한 달이 걸리지 않아 그 빛나는 모습을
다시 찾았다. 그 재주는 군영 중에서 으뜸이었고, 그 뜻은 직책을 다했으니, 이 모두가 가상한 일이다.
수원부사로 부임하여 관할구내에 있는 독산성을 순시하던 이의풍은 진남루가 낡아 오르기에
도 어려운 것을 보고 수리를 생각하지만, 곧바로 공사에 착수하지는 못한다. 햇수로 2년이 지나
서 공사를 시작한 것은 공사비 마련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1753년 어느 때 수원부사인 ‘나’
(이의풍)가 중영장 김경유의 제안을 듣게 된다.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수리할 것이니 자신에
게 맡겨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까. 2년이 지난 후에 보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김경유는 그
해에 수원부 중영장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건축에 나름의 전문지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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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유(金景游, 1698~1773) 는 초서를 잘 쓰고 문장에 뛰어난 무인으로 『노은유고』라는 문
집을 남겼다. 그의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지일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다. 1751년에 무이만호
에 임명되고, 1762년부터 1766년까지 5년 동안 창덕궁 위장을 지냈으며, 동지중추부사와 오위
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 부친이 공조참판을 지낸 사실과 그의 어머니가 사양재 강호보와 같
은 ‘진주 강씨’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김경유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
지만, 『승정원일기』에 몇 차례 등장한다. 가장 빠른 것이 1751년, 무이만호에 임명되었다는 기록
인데, 진남루를 수리한 1753년보다 2년 전이다. 부친이 공조참판을 지냈는데 김경유 자신은 말
년에도 창덕궁 위장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 역시 강호보처럼 서자로 보인다.
42) 수원부사 이의풍이다.
43) 본관이 경주(慶州), 자는 군철(君哲), 호가 노은(老隱)이다.
192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