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0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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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가졌다. ‘직부전시’란 과거에 급제한 합격자들에게 등수를 결정하는 시험을 치루게 하는
특혜이다.
임진왜란으로 기병 중심으로 편성된 오위가 해체되고 한양을 되찾은 1594년에 보병이 중심이
된 훈련도감이 유성룡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이때 지방에는 속오군을 조직했다. 수원에 창설한
속오군의 병력은 3,000명이다. 이들을 지휘한 중군의 직속으로 기수·고수·취수가 60여 명이
배치되었다.
1610년 비변사의 보고에 따르면, 경기도의 산성 17곳 중에서 수원의 독산성만 유일하게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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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있었다. 전란이 일어나자 독산성은 임금의 피난처로서 활용되었다. 1624년 2월 11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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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의 반군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도성을 빠져나온 인조가 피난처로 찾은 곳이 독산성이다.
독산성에 주둔하던 경기방어사 구인후(1578∼1658)가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
가 인조를 호종하여 어영대장에 오른다. 구인후를 이어 수원부사에 임명된 조계원(1592~1670)
이 군사 수를 2천을 더해 5천 명으로 늘렸는데, 이때부터 수원의 병력은 5천 명으로 고정되었
다. 인조시대에는 훈련대장과 수원부사의 위상이 엇비슷했다.
1654년 12월, 효종은 총융사를 경기도에 보내 각 고을의 군사와 병기들을 점검했는데 수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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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도내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효종은 수원부사 유혁연(1616~1680)에게 말을 하사하고
승지에 제수하고, 얼마 후 어영대장에 임명하여 훈련대장 이완과 함께 북벌정책을 수행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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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수원 군사가 훈련도감 군사보다 더 낫다.”라고 평가했던 효종은 “임진왜란 이후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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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무향(武鄕)이라 부른다.”며 군사들을 제대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지시하였다. 무향이란 말
속에 독산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좌의정 이시백(1581~1660)의 보고에 따르면 1651년 당시 독산
성에 민가가 40여 호(戶)나 있었다. 33)
28) 『승정원일기』광해2년(1610 경술) 1월 17일(갑오)
29) 『승정원일기』인조2년(1624 갑자) 3월 9일(계해)
30) 『승정원일기』효종5년(1654 갑오) 12월 5일(신유)
31) 『승정원일기』효종5년(1654 갑오) 12월 19일(을해)
32) 『승정원일기』효종2년(1651) 10월 25일
33) 『승정원일기』효종2년(1651) 10월 25일
188 김영호